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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킴(지정 미지정)122

수원시향토유적 제8호 꽃뫼제사유적지 문화재로 지정받지는 못했지만 보호할 가치가 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지자체에서 향토유적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원시 향토유적 제8호로 1998년 9월 17일 지정된 꽃뫼제사유적지가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688-4에 있다. 이 유적은 1997년 수원대학교 박물관팀이 1997년 발굴하여 구멍무늬 토기편, 제사에 쓰이는 용기가 발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람이머무는 곳"이란 다음 블로그에는 백자, 청자, 분청사기 등 자기류, 청동숟가락, 상평통표, 쇠칼 등이 발견되었다고 하나 그 출처는 알 수 없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오늘 이곳을 처음으로 찾았다. 꽃뫼란 꽃이 피는 산이란 뜻이며 한문으로는 화산(花山)이다. 화서역에서 서울방향으로 100미터 지점으로 철로의 서쪽편에 있다. 이곳은 산이라기 보다는 작.. 2022. 3. 13.
만석거의 겨울 풍경 만석거는 정조 때 1795년 수원화성을 건설하면서 군량미 조달을 위하여 만든 저수지이다. 근래에 주변이 도시 개발로 농지가 없어지면서 시민의 쉼터로서 공원으로 역활을 하고 있다. 내가 1977년 만석거 북쪽 편 주택으로 이사했을 때는 주변은 농지였고 주택은 유신주택이란 연립이 있었고, 단독 주택도 10여호 밖에 없었으며, 만석거는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1970년대에는 저수지 안쪽으로 무허가 건물이 몇 채가 있었고, 주변이 개발되기 전이라 수질이 괜찮아 낚시꾼들이 제방에 수 십명씩 있었다. 만석거는 공원으로 개발되면서 크게 제방 쪽만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전부 변형을 시켰다. 그 때 둘레길을 조성했다. 지난 1월 11일 날씨가 맑은 날 만석거를 찾았다. 푸른 하늘에 눈 덮힌 만석거가 햇.. 2022. 2. 12.
수원역 급수탑 철도역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다. 증기기관차는 물을 끓여 나오는 수증기의 압력으로 피스톤을 돌려 운행한다. 그래서 증기기관차는 물이 필수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기 전까지 증기기관차가 운행되었다. 증기기관차는 급수를 위하여서는 우선 물을 급수탑 바로 옆에 있는 급수정으로 모으고, 펌프를 이용하여 지하관을 통해 급수탑 위의 급수탱크까지 물을 올린 후 기관차에 공급하였다. 수원역 급수탑은 현재 2기가 있다. 높이 18.1m의 콘크리트조 급수탑1기와 높이 7.9m의 빨간 벽돌조 급수탑 1기가 나란히 서 있다. 콘크리트조 급수탑은 광궤철도의 급수탑이고, 벽돌조 급수탑은 협궤철도의 급수탑으로 동일한 장소에 광궤와 협궤 급수탑이 같이 있는 곳은 수원역뿐이다. 경부선은 190.. 2021. 12. 9.
남이 장군 묘 탐방 남이 장군은 28살의 젊은 나이에 역적으로 모함받아 사형을 받은 비운의 장군이다. 그의 묘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남전리 산 145에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 198-3 남이섬에도 있다. 민족문화백과사전에는 남이장군 묘는 화성시에 위치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남이(南怡, 1441~1468)는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의 손자이다. 그는 1457년(세조 3) 17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27세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28세에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세조 13년(1467년) 9월25일, 남이 장군은 강순·어유소 장군 등과 더불어 1.. 2021. 11. 14.
녹음이 짙어 갈 즈음 찾은 만석공원 만석공원은 1796년 정조에 의해 화성을 건설하던 중 극심한 가뭄이 들어 화성건설을 중단시키고 화성의 북쪽에 만석거 만들었고, 그 아래 황무지를 개간해 대유평이란 농토를 조성하였다. 만석거가 바로 이 저수지이며 한 때는 일왕저수지 또는 조개정방죽이라고도 불렀다. 만석거 축조 당시 다른 곳은 큰 가뭄피해가 있었으나 대유평은 풍년이 들어 정조께서 저수지 조성만한 것이 없다고 했었다. 만석거는 유적지이나 정조 이후 1970년대까지 거의 돌보지 않았다. 내가 이곳 만석공원이 바로 앞에 내다 보이는 송죽동으로 1979년 이사 왔을 당시에 낚시꾼들이 많았고, 섬 가운데에 민가 2채가 있었다. 만석거라는 표지석이 외딴집 울타리 아래에 있어 그곳을 지나면서 "만석거" 이 돌이 무엇일가? 궁금했었다. 그 동네에서 199.. 2021. 5. 10.
만석공원(만석거: 萬石渠) 돌아보기 만석공원은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성했던 1794년 심한 가뭄이 들어 공사를 중단하고 수원 북쪽에 저수지와 그 아래 황무지를 개간하여 대유평을 1796년 완공했고 만석거(萬石渠)라고 불렀다. 원래 만석거라고 불렀으나 그 후 일왕저수지 또는 조개정방죽이라고 불렀으나 지난해 명칭이 원래 이름인 만석거라고 공식명칭이 변경되었다. 나는 이곳 이 저수지 북쪽 송죽동에서 1979년 1994년까지 살았다. 나의 두 아들에게는 이곳이 어린 시적을 보냈다. 이 동내로 이사 왔을 당시에는 백조아파트도 없었고, 단층 가옥 20여채가 있었고 가게라고는 3개가 있었던 시골마을이었다. 경수산업도로가 건설되기 이전으로 1번 국도로 버스가 동네 앞으로 지났다. 오늘 산책코스로 만석공원로 정하고 연초제조창을 지나 정자시장을 통과하여 40.. 2021. 4. 11.
축만제(서호)와 그 주변 유적지 해설 포스터 축만제(서호)와 그 주변 유적지에 대한 해설 자료를 '중림곤충관' 본 블로그에 작성했으며, 그 내용 중에서 중요한 사항을 뽑아 쉽게 볼 수 있도록 포스터로 작성했습니다. 2021. 4. 1.
서호(축만제) 해설(13): 농촌진흥청 유적 우리나라 근대 농업연구는 홍영식(洪英植)이 미국 시찰 결과를 보고하면서 설치를 건의한 바, 고종의 토지 하사와 재정 지원으로 적전(籍田)이 위치한 서울 망우리에 농무목축시험장이 1883년 12월 20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1884년 봄 보빙사 일행이 미국에 체재할 때 주문한 농기구가 시험장에 도착해 미국 농무성으로부터 가져온 각종 작물·야채·과수 등 344종(재래종 포함)을 재배하였다. 왕실에서 관리하던 것으로 종목국(種牧局)으로 개칭하여 내무부(內務部) 농무사(農務司)에 속하게 되면서 흐지부지 되었으나 시험장은 1906년까지 존속되었으나 거의 방치되었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1906년 6월 15일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에 조선총독부 아래에 권업모법장을 설치했다. 권업모범장의 처음 .. 2021. 3. 14.
일월저수지에 일제의 흔적을 보고 오늘 오후 서호공원 둘레길 한 바퀴 돌고나서 여기산 뒤를 지나 일월저수지에 도착해서 이 저수지 둘레길을 한바퀴 돌았다. 이제 입춘도 지나 날씨는 많이 풀렸다. 엊그제 내린 눈이 녹아 땅은 질척거리는 곳도 있었지만 걷기에 크게 장애는 되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라 산책하는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서호공원에 비하면 아주 적었다. 길 좌측편(동편)으로는 수목원 조성공사하면서 하얀 담이 둘러처 있었다. 이 수목원 2022년 완공예정으로 앞으로 완공이 되면 저수지에서 수목원 공원이 되면 더 좋은 시민의 휴식처가 될 거라 기대된다. 저수지 물 속으로 한가롭게 헤엄치는 흰빰검둥오리, 물닦 등 철새를 보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걷는다. 북쪽 주차장을 지나자 땅이 좀 질었으나 별 개의치 않고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저수지 .. 2021. 2. 6.
유서 깊은 향미정(杭眉亭) 향미정은 1831년 화성유수 였던 박기수가 서호저수지 제방 끝에 세운 정자다. 항미정(杭眉亭)의 항미(杭眉)는 소동파가 중국 항조의 서쪽에 있는 서호(西湖)를 미목(眉目) 같다고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항(杭)은 항주에서 따왔고, 미목에서 眉자를 따온 것이다. 모처럼만에 수원에 눈이 와 향미정도 설경을 보여주고 있다. 늘 서호공원 둘레길 돌기가 평소 나의 운동이지만 그냥 지나치기만했는데 오늘은 구석 구석을 살펴 보았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현판이 새로 걸렸다. 예전에 아주 작은 간판이 걸려 건물 격에 맞지 않았는데 이번 새로 걸은 현판은 큼직하고 글씨도 명필로 품격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 내용에 "순조 황제가 1908년 10월 2일 이곳에서 차를 마셨다는 유서 깊은 곳이라는 내용이 눈에 띠었다. 본 .. 2021.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