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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킴(지정 미지정)

남이 장군 묘 탐방

by 仲林堂 김용헌 2021. 11. 14.

남이장군 묘이다. 석물로 문인석과 망주석이 좌우로 있고, 화성군수가 세운 묘비가 있고 상석이 있다.

남이 장군은 28살의 젊은 나이에 역적으로 모함받아 사형을 받은 비운의 장군이다. 그의 묘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남전리 산 145에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 198-3 남이섬에도 있다. 민족문화백과사전에는 남이장군 묘는 화성시에 위치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남이(南怡, 1441~1468)는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의 손자이다. 그는 1457년(세조 3) 17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27세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28세에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세조 13년(1467년) 9월25일, 남이 장군은 강순·어유소 장군 등과 더불어 1만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오랑캐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개선하는 길에 남이 장군은 백두산을 지나게 됐다. 그때 장군은 북정가(北征歌)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그가 모함을 받게 되는 아래에 있는 문제의 시가 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豆滿江波飮馬無)

남자 나이 스물에 적을 평정 못하면(男兒二十未平賊)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後世誰稱大丈夫).”  

 

남이 장군은 세조의 장인인 남휘의 손자로 출신성분도 진골이라고 할 수 있고, 무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니 무예가 뛰어 나 압록강 넘어 오랑캐를 무찔렀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 1등으로 책록되었으니 대단한 인물이었다. 특히 지금의 국방부장관인 병조판서에 26세에 올랐으니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으나 유자광의 무고로 28세에 역적으로 처형되었으니 안타까웁기 그지 없다.

 

올해 농진청 용역 사업 수행 차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여려 차례 다니면서 "남이장군 묘" 표지간판을 보며 언제 한번 가봐야지 하며 일년이 지났고, 마침내 오늘 11월 14일 오전 이곳을 찾았다. 

 

그가 역적으로 사형을 당해서 그런지 묘소는 석물은 있지만 명성에 비하여 낮은 보통 사람들의 묘와 비슷했다. 역적으로 죽었으니 당초에는 비석도 없는 무덤이었던 것 같다. 사후 200여년이 지나 문인석이 세워졌고, 비석은 500년이 지나 최근 세워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누명을 벗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하지만 당시에 얼마나 억울 했을 까?

 

문화재청이 게시한 남이장군묘 간판이다.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에서 본 남이 장군 묘다. 묘비에 병조판서 충무공 남이장군지묘라고 쓰여 있다. 역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당시 비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비석은 1971년 후손이 세웠다.
1971년 15대, 16대 후손이 세운 비석이다.
문인석은 문화재청에서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이 장군은 죽은 해는 1468년으로 이 문인석은 장군 사후 200년이 지나 세운 것이 된다. 그가 장군이었지만 사후 그를 수호하는 것은 무인석이 아니라 문인석이다.

 

코가 떨어져 나갔다. 고의로 파괴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풍화에 의해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남이장군이 지은 시다. 이 시로 인해 그는 억울하게 죽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의 호탕한 기개를 존숭하며 회자(膾炙)되고 있다. 많은 묵필가들이 그의 시를 서예 작품으로 쓰고 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에 먹어 다 없앴다( 豆滿江波飮馬無)고 했으니 그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남자로 20에 적을 평정못한다고 하면(男兒二十未平賊)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後世誰稱大丈夫)고 했으니 세상에 거칠게 없는 기상이다. 이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졌다면 예나 지금이나 못 이룰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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