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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향교346

문선왕묘 이안고유제문(文宣王廟移安告由祭文)a written prayer to Confucian after removing Suwon Hyanggyeo from old city to new city 다. 수원 이읍(移邑) 시 새로 세운 향교 위판(位版)봉안한 문선왕묘 이안고유제문(文宣王廟移安告由祭文) 문선왕묘(文宣王廟)에게 1795년 음력 5월 6일 구읍에서 신읍인 현재 수원향교로 옮겨 모시는 까닭을 알리는 제문이다. 건륭60년(1795) 세차 을묘 5월 신해 삭 초 6일 병진에조선 국왕은 삼가 신하 수원부판관홍원섭(洪元燮)을 보내어 감히 선성이신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께 밝게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 대 집의 기둥이 허물어지게 되면 빨리 수선함이 마땅한지라 길일을 택하여 옮기기를 청하며 그 이유를 경건하게 고하고 삼가 희생과 단술과 메쌀과 여러 제물을 차려 놓고 밝게 올리면서 선사이신 연국복성공안씨(兗國復聖公顔氏)와 성종성공증씨와 기국술성공공씨(沂國述聖公孔氏)와 추국아성공맹씨(鄒國亞聖公孟.. 2021. 10. 24.
정조가 수원향교를 방문한 그날 모습 나. 1795년 윤2월 11일 수원향교 모습(Appearance of Suwon HyeongGyeo on leap Febuary 11th by lunner calender in 1795) 임금이 화성의 행궁에서 수원향교 성묘(聖廟: 공자의 신위에 展拜) 나가실 때 앞뒤에서 수백 명의 군병이 앞뒤에서 호위했다. 수원향교에 도착하여 호위병이 둘러 경계를 하고 진입하는 입구를 만들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을묘 윤2월 10일의 기록을 보면 정리소(整理所)21)와 병조가 “임금께서 성묘 참배할 때 어느 군영의 기마병과 보병, 그리고 몇 초(哨: 1초는 100명)의 군병으로 거행하느냐고 여쭙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 전교하시길“장용영의 친위군 200명과 보병 5초(500명)를 거느려 전방과 후방 호위군으로 하라”라고.. 2021. 10. 24.
정조대왕이 수원향교에 친임하여 은전을 내리다. 2. 정조의 자취를 찾아서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정조 임금 수원향교에찾아 성현에인사 올리고 친히 축문 지으셨네 봉수당에서어머니 회갑 잔치를 열었고, 낙남헌에서어르신들에게 잔치를 베프시었네 가. 정조대왕이 수원향교에 친임하여 은전을 내리다(King Jeongcho visited at Suwon HyangGyeo in 1795) 교통이 좋지 않았던 예전에 임금이 지방 향교의 방문은 흔치 않았으나 정조대왕은 수원향교를 두 번씩 친임(親臨)하여 알성(謁聖)참배했다. 첫번째는 정조 19년(1795) 1월 17일 현릉원(顯陵園, 사도세자의 능) 참배를 하고 귀행 길에 수원향교에서 봉심(奉審)하고 명륜당에서 유생이 몇 명이나 되나 물었다(日省錄 정조15년 1월 17일). 이때가 처음 수원향교의 친임이고, 두 번째가 .. 2021. 10. 24.
수원의 연원(淵源); Origin of Suwon City 나. 수원의 연원(沿源); Origin of Suwon City 수원 지명은 삼국시대에 고구려는 매홀군(買忽郡)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757년)에는 수성(水城, 隨城)이라 개칭하였으며, 고려 태조가 수주(水州)로 승격시켰으며, 성종 때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 때 없애버리고 현종 9년(1018년) 지수주사(知水州使)로 회복하였다. 원종 12년(1271년) 양광주도에 속한 수주(水州)에서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되고 비로소 수원(水原)이란 지명으로 개칭되었다. 1271년(원종 12) 대부도(大阜島)에 몽고병이 쳐들어오자 도민들이 그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부사 안열(安悅)을 시켜 이를 평정하였는데, 그 공으로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충렬왕 34년(1308년)에 도호.. 2021. 10. 24.
수원향교 연혁(history of Suwon Hyaogyo) 1. 뿌리를 찾아서 천년의 여정 수원향교 그 뿌리를 찾아 가. 수원향교 연혁 옛날 수원은 현재 수원시에서 남으로 약 8km 지점인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에 있었으며, 수원향교는 충렬왕 17년(1291) 화산(花山) 앞 당시 수원 읍치(邑治)에 세웠다. 당시 수원은 수주사(水州使)였으나 1271년 몽고군의 침략을 토벌한 공으로 수주도호부(水州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도호부는 계수관(界首官에 해당하여 계수관이 있는 도시에서는 반드시 과거시험의 첫 관문인 ‘계수관시(界首官試)를 향교에서 치르게 하였으므로 수원향교는 다른 향교에 비하여 100여 년 빨리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1661년 (현종 2) 수원부 남쪽 3리 되는 독올산(秃屼山)으로 옮겼다고 기록된다. 그러나 독올산은 문헌이나 옛 지도에서 보이지 .. 2021. 10. 24.
수원향교 안내(총괄) 향교는 조선시대에는 국립 지방교육기관으로 고을에 인재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향교가 무엇을 하고 있는 곳인지 모르고 있다. 근래 과학, 사회 등 일반 학문은 중등학교나 대학에서 맡아 하고 있으나 현재 유교의 중심 사상인 도덕윤리 교육은 향교에서 맡아 하고 있다. 수원향교는 전국을 대표하는 향교 중 한 곳이다. 수원향교에서 하고 과거와 현재를 아래와 같이 안내한다. 수원향교 안내 목적은 대학지도(大壑之道)에서 나온 것과 같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하여 최고의 선에 머므르게 하고 자 함이며, 그리고 수원향교을 널리 알려 많은 사람들이 향교에 찾아 와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여 자신을 닦고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여 평안한 세상을 만들고 자 함이다.. 2021. 10. 24.
독일인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수원향교 옛 사진 재일본독일대사관 무관인 헤르만 산더(H. T. Sander)가 일본과 러시아가 싸웠던 중국 만주, 조선 등 여러 곳을 정탐하고자 여행했다. 1907년 우리나라에도 서울, 평양, 성진, 인천, 수원 등 여러 곳을 여행했으며, 수원에 방문에서도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겼다. 수원 방문 사진 중 아래 있는 사진 한 장이 수원향교를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이 책자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것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다시 수원 사진만을 모아 수원화성 완공 22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이방인이 본 옛 수원화성"이란 책자에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의 원본에는 헤르만 산더는 '남쪽 시외에 있는 절'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수원향교를 절로 잘 못 알고 절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진은 향교를 먼 곳에서 촬영하여 건물 구분이 쉽지는.. 2020. 12. 9.
정조대왕이 은전을 내린 수원 향교 수원향교(전교 송중섭)는 고려 충렬왕 17년(1291년) 당시 수원읍인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 일대에서 창건하여 그 자리에서 498년 동안 보존됐으나 정조대왕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花山)으로 천장(遷葬) 하기 위하여 수원읍지(水原邑地)를 팔달산 동남쪽 화성(華城) 사대문 안으로 옮기면서 수원향교도 1789년 9월 13일 현재의 위치인 수원시 팔달구 교동 43번지로 옮겨 세웠다. 이때 수원읍지 건설에 총 258.5칸 건물이 세워졌으며 그 중 행궁이 27칸이고 향교가 71칸으로 향교 건물이 행궁 건물보다 2배가 넘는 규모다. 건물 규모만으로 볼 때 향교의 위상이 얼마나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원은 1949년 8월 15일 읍에서 시로 승격되었다. 그때 인구 5만 명의 소도시에서 지금.. 2020. 12. 8.
수원향교, 음력 9월 삭분향례 봉행 수원향교(전교 송중섭)은 2020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음력 9월 초하루 분향례를 37여명의 장의와 유림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했다. 이날 헌관은 유관식 장의, 집례는 유선종 장의, 알자는 김석우 장의, 봉향은 이종진 장의, 봉로는 오완수 장의가 각각 맡았다. 대성전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가운데 분향례가 봉행되었다. 2020. 10. 17.
수원향교 공기 2571년 추기석전 봉행 수원향교(전교 송중섭)는 9월28일(음 8월12일) 오전 11시 맑은 가을 날씨에 공부자 탄강 2571년(2020년, 庚子) 추기석전(秋期釋奠)을 70여 명의 유림과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봉행했다. 코로나19 감염병의 발생으로 예년에 비해 외부인의 참석 없이 간소하게 치러졌다. 이날 대제는 초헌관에 송중섭 전교, 아헌관에 인현준 장의, 종헌관에 권혁원 감사, 동종향분헌관에 이종길 장의, 서종향분헌관에 최승덕 장의가 제관으로 봉행했고, 집례는 최화호 장의, 당하집례에 이복균 장의, 대축에는 강신수 장의가 각각 맡았다. 그리고 묘사에 유선종 장의, 알자에 류남용 장의, 찬인에 최지운 장의와 안재근 장의가 맡았고, 오성위에 대한 봉향은 어수갑 장의, 봉로는 박창순 장의, 봉작에 김석우 장의, 전작에 권순만 장.. 2020.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