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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향교/수원향교 안내

정조대왕이 수원향교에 친임하여 은전을 내리다.

by 仲林堂 김용헌 2021. 10. 24.

2. 정조의 자취를 찾아서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정조 임금

수원향교에찾아 성현에인사 올리고 친히 축문 지으셨네

봉수당에서어머니 회갑 잔치를 열었고,

낙남헌에서어르신들에게 잔치를 베프시었네

 

 

. 정조대왕이 수원향교에 친임하여 은전을 내리다(King Jeongcho visited at Suwon HyangGyeo in 1795)

 

교통이 좋지 않았던 예전에 임금이 지방 향교의 방문은 흔치 않았으나 정조대왕은 수원향교를 두 번씩 친임(親臨)하여 알성(謁聖)참배했다. 첫번째는 정조 19(1795) 117일 현릉원(顯陵園, 사도세자의 능) 참배를 하고 귀행 길에 수원향교에서 봉심(奉審)하고 명륜당에서 유생이 몇 명이나 되나 물었다(日省錄 정조15117). 이때가 처음 수원향교의 친임이고, 두 번째가 다음의 원행을묘 때이다.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1795년 을묘 윤29일부터 16일까지 화성능행차를 한다. 첫날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다음 날 화성행궁에 도착한다. 당초에는 그다음 날인 윤211일 현륭원(사도세자 능 융릉) 참배를 할 계획이었으나 오랜 시간 어머니께서 피로로 심하여 일정을 바꿔 묘시(卯時)에 수원향교에서 알성 전

(展拜)했다.

 

정조께서 자궁(慈宮)을 모시고 화성 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묘시(卯時)화성 성묘에 전배하려고 거동하셨다. 임금께서 화성행궁에 임하시여 동부승지 이조원에게 하교 하시기를 우화관에서 유생들을 먼저 입장토록 하라고 하셨다.

 

알성(謁聖)할 때 반열에 참여할 유생은 태학 알성 시 집사 유생의 예의 의거하여 어가(御駕)를 따라 입장하도록 하라하셨다. 묘시 초삼각(65) 임금께서 군복을 갖추고 말에 올라 출발하시어 중양문, 좌익문, 신풍루를 지나서 팔달문으로나와 향교 문밖에 이르러 하마(下馬)하시여 명륜당 대차(大次)에 들어가셨다.

 

백관도 그대로 따라 수가복색(隨駕服色)으로 성묘의 문밖에서 반열을 이루어 정열하고 예방승지, 병방승지, 좌우사는 조복(朝服)으로 갈아입었다. 유생들은 청금복(靑衿服)을 입었다. 임금께서 면복(冕旒冠袞龍袍)으로 바꾸어 입으

시고 행례(行禮) 함에 배종(陪從)하는 백관(百官)과 유생들이 동시에 의(儀範)에 따라 행례하였다. 행례가 끝나자 성묘 안으로 들어가 봉심하셨다.

 

봉심 후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중앙은 태학(太學)이고, 지방은 향교지만 성묘는 한가지이다. 그러나 용마루와 처마가 볼품이 없이 허술하고 단청(丹靑)이 더럽혀졌고, 바랬으며 의자와 상탁(床卓) 등이 모양이 좋지 않다며 지금 당장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시니 대사성(大司成) 이만수가 아뢰길 개수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는다른 고을에서 멀리 온 사람이 있는가?”하시니 우승지 이운익이 아뢰기를 정시(庭試)에 든 사람은 36인이며, 그 가운데 2인은 용인에 사는 사람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본부(수원)에 사는 사람인데 연수가 짧아 과거를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임금께서 유무적(有無籍)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과거시험에 받아들이라라고 하셨다.

 

임금께서 명륜당에 환어(還御)하시어 군복으로 갈아입고 이익운에게 하교하시기를 본부(수원) 향교에 들으니 옛날에는 노비, 전결(田結)이 있었으나 주관할 사람이 없어서 지금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선조 경신년(1740, 영조 16)에 개성에서 행행(行幸)해서 성묘에 참배하고 경적(經籍)과 노비, 전결(田結)을 교궁()20)에 하사한 예가 있으니 전례에 따라 전토, 노비를 논할 것이 없이 호조에서 나눠줄 것을 유사 당상이 대신과 논의하여 시행케 하라.”고 하셨다.

 

임금께서 향교 문밖으로 말을 타시고 팔달문을 지나서 신풍루, 좌익문, 중앙문으로 들어가 환래(還來)하셨다.

 

정조대왕 수원향교 전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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