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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향교/수원향교 안내

수원향교 연혁(history of Suwon Hyaogyo)

by 仲林堂 김용헌 2021. 10. 24.

1. 뿌리를 찾아서

 

천년의 여정 수원향교

그 뿌리를 찾아

 

 

 

. 수원향교 연혁

 

옛날 수원은 현재 수원시에서 남으로 약 8km 지점인 화성시 봉담읍 와우리에 있었으며, 수원향교는 충렬왕 17(1291) 화산(花山) 앞 당시 수원 읍치(邑治)에 세웠다.

 

당시 수원은 수주사(水州使)였으나 1271년 몽고군의 침략을 토벌한 공으로 수주도호부(水州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도호부는 계수관(界首官에 해당하여 계수관이 있는 도시에서는 반드시 과거시험의 첫 관문인 계수관시(界首官試)를 향교에서 치르게 하였으므로 수원향교는 다른 향교에 비하여 100여 년 빨리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1661(현종 2) 수원부 남쪽 3리 되는 독올산(秃屼山)으로 옮겼다고 기록된다. 그러나 독올산은 문헌이나 옛 지도에서 보이지 않고 해동지도 등 수원부 지도는 도고산(道高山) 옆에 있다. “수원시사 16, 이곳에 가면 수원의 역사가 보인다. 2장 수원향교 이야기를 쓴 김자운은 독올산과 도고산은 발음이 유사하여 서로 음차(音借)한 것으로 같은 지명으로 보고 있다.

 

수원향교는 도고산 아래에 있다가 지금의 융건릉 자리로 다시 옮겼는데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수원은 도호부라 수원향교 교생의 정원이 70명이고, 6인 교수 1인이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관찰사가 수시로 감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과서는 소학(小學)과 사서오경(四書五經)이 중요한 학과이고, 근사록(近思錄),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 등도 가르쳤다.

 

유원형이 저술한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수원부 읍치를 개활지로 옮겨야 한다는 실용적이고 근대적인 제안이 있었으며, 그 후 정조는 윤선도의 음택(陰宅) 풍수 논리를 수용하여 장현세자(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옛 수원부 읍치로 옮길 것을 결정하고, 수원 읍치와 그 앞에 있는 민가 500여 호도 당시 팔달산 동쪽으로 옮겼다.

 

그때 수원향교도 1789(정조 13) 913일 팔달산 남쪽 지금의 위치에 새 건물로 낙성되었다. 이건 당시 기록에 의하면 대지가 1,300여 평에 임야가 4,500여 평이었다. 건물은 대성전 20, ·서무 각 3, 내신문이 3, 명륜당이 10, 동서재가 각 6, 외신문이 3, 전사청이 18칸이었다. 동재 앞으로 네모난 연못을 설치했고, 뒤편으로 전사청을 수리하여 세웠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향교를 옮겨 짓는 과정에서 재목(材木)은 구건물의 묵은 것을 그대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뜰은 좁고 배수가 잘되지 않아 습기가 찼다. 당시 화성유수 조태심이 조정에 건의하여 정조의 재가를 받아 정조 19(1795) 89일 중건했다.

 

수원향교의 재산은 정조 13(1989) 대지와 임야와 함께 300석을 추수할 수 있는 전답을 가지고 있었으나 건국 후 농지개혁으로 모두 분배되고 답이 1,800여 평이 있었다. 농지 분배로 받은 지상증권(地償證券)마저 콩기름 공장에 투자하였으나 얼마 후 경영부실로 탕진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와 6.25 병화(兵禍)를 당하여 건물은 심하게 퇴락하였다. 특히 대성전에는 미군이 주둔하는 참화가 있었다. 동서재는 1949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분명히 아는 사람이 없고, 6.25 사변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원향교는 19839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1호로 지정되었고, 대성전은 20201229일 국가지정문화제 보물(2090)로 지정되었다.

 

수원부 옛지도, 중앙에 빨간 원에 "鄕校"라고 쓴 곳이 수원향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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