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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중국(태안, 곡부, 칭따오)

공자묘 친견(親見)

by 仲林堂 김용헌 2019. 6. 8.

공자묘(孔子墓)를 접견하려면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일행은 만고장춘방(萬古長春坊)에서 신도(神道)를 지나 대림문(大林門)과 이림문(二林門)을 통과했고, 전통셔틀카를 타고 명대묘군으로 돌아 우씨방(于氏坊)을 지나 공자묘의 입구인 수수교방(洙水橋坊)에서 하차했다.

 

이 방 바로 앞에 수수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하여 책을 불사르고 태우고 유림을 생매장을 했다(焚書坑儒). 그 때 생매장하기 위하여 땅()을 판 곳이 이곳 수수하(洙水河)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수교를 건너자 묘문(墓門)이 가까이 보인다. 수수교에서 묘문까지 길 양편에 많은 비석이 가로수가 있는 듯 도열해 있다.

 

묘문을 통과하자 양편으로 천년 향나무 고목이 늘어 서 있는 곧게 난 묘통도(墓通道). 거대한 고목이 신을 맞이하려 듯하다. 고목 아래 양편에 세 종류의 전설 속의 동물이 있다. 악귀(惡鬼)를 쫒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모습이 사나운 것은 없고 부드럽다.

 

그리고 일행이 도착한 곳은 공림에서 가장 큰 건물인 향전(享殿)이다. 향전 바로 앞에 키 큰 문인석이 참배자를 맞이하고 있다. 빨간 기둥의 황 기와집이다. 이 궁전은 명대 홍치 7년에 창건했고 옹정 10(1732) 중건했다. 옹정 10년 중건 때 기와를 황제의 건물과 같이 황색으로 교체했다고 한다. 향전 내부에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있었다. 향전은 공묘에서 제례 봉행할 때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고, 제관과 집사가 제복을 관리하고 환복하는 곳으로 생각된다.

 

향전을 지나자 자공이 심었다는 나무()가 눈길을 끈다. 그 옆 비석에는 자공이 손으로 심었다는 子貢手植楷(자공수식)란 비문이 있다. 이 비문에 방문자들의 손때가 많이 묻어 있다. 아마도 이 비석을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라도 있지 않나 본다.

 

공자묘 가는 길에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공급(孔伋)과 공자의 아들인 공이(孔鯉) 묘가 있다. 자사묘는 공자의 묘 보다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자사묘에는 기국술성공묘(沂國述聖公墓)란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묘는 남북 21m, 동서 18m, 높이 4m이다. 우리 일행은 5성위 중 한 분인 자사자를 잘 알고 있어 배례하고 여러 사람이 자사자 묘 앞에서 기념 촬영했다.

 

공자의 아들인 공리(孔鯉)묘는 공자의 묘와 조금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묘는 남북 32m, 동서 18m, 높이 3m이다. 묘전 비석에는 泗水侯墓라고 써 있다. 송나라 때 휘종이 공리를 사수후라고 봉했다.

 

공리묘를 지나 자 드디어 인류의 사표(師表)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의 묘다. 우리 일행은 숭상의 마음으로 공부자의 묘 앞에 섰다. 그리고 일행은 모두 서립하고 나는 집례로 창홀했고, 일행은 창홀에 따라 배례를 했다. 공자묘의 길이 30m, 높이 5m이다. 묘는 자연 속에 묻혀 있다. 우리 인간도 하나의 자연의 일부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나이다(天人合一). 살아서 뵐 수 없지만 돌아가신 후 성인의 무덤을 친견할 수 있음은 큰 영광이다. 또 여러 사람을 인솔하여 올 수 있었음은 하나의 큰 보람이다. "공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리라" 마음으로 새기면서 참배했다.

 

일행은 참배를 마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 공부근처에 있는 호텔 곡부궐리빙사(曲阜厥里賓舍)에 도착했다.

 

 

수수교방(洙水橋坊)이다. 이 방 뒤쪽 다리가 수수교이다. 다리 뒤에 묘문(墓門)이 보인다.

 

 

묘문(墓門)으로 참배객들이 들어 가고 있다. 많은 묘비가 묘문 입구 길 양쪽에 서 있다.

 

 

묘문(墓門)을 나오니 곧게 뻗은 신도(墓道)가 내려다 보인다. 수 천년된 향나무 고목이 길 양편으로 서 있다. 참배객들은 공자묘를 향해 가고 있다.  

 

 

악귀를 쫒는 전설속의 동물이다. 위엄은 있지만 부드러운 모양이 사납게 보이지는 않는다.

 

 

또 다른 형상의 동물이다. 이 동물도 하늘로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 그 뒤에 향전(享殿)이 보인다.

 

 

키가 아주 큰 문인석이 향전 앞에 있다. 향전은 기둥과 벽은 붉은 색이고, 기와는 황궁과 같이 황색이다.

 

 

향전을 지나자 자공이 심었다는 고목이 있다. 자공은 공자보다 31살이 젊으니 2500년 전 사람이다. 이 나무 수령이 약 2500년이다.

 

 

 

자공이 손수 심었다는 비석이다(子貢手植楷). 이 나무를 공목(孔木)이라고도 부른다.

 

 

공자의 손자 공급(孔伋)의 묘이다. 그의 호는 자사(子思)이고, 송나라 휘종 때 시호를 기수후(沂水侯)를 받았고, 원나라 문종 때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을 받았다. 그는 중용(中庸)을 저술하였다.

 

 

공자의 묘이다. 묘의 길이 30m, 높이 5m, 묘전에 비석이 둘이 있다. 뒤에 있는 비석은 앞에 있는 비석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석등이 있다. 근래 나무로 된 제상(祭床)이 있다. 봉분에는 잔디는 없고 풀이 나 있다.

 

 

윤금열 간성향교 원임전교와 임병운 수원향교 장의가 대표로 나와 4배했다.

 

 

큰절한 분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묘전에서 서립한 후 입배로 4배했다.

 

우리 일행 전원이 독사진을 찍었다. 나도 공자묘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묘에 잔디를 심지 않고, 묘 주변에 큰 나무가 있어도 제거하지 않는다.
공자묘에 큰 나무가 있다.
봉분에는 잔디는 없고 풀이 나 있다.
뒤에 있는 비석은 원대 1244년 세운 비석으로 비문은 宣聖墓(선성묘)이다.
공자묘 게시판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자(BC551년-BC479년)는 이름은 구(久)이고, 자는 중니(仲尼)이고, 우리나라의 고대 위대한 사상가, 교육가, 유교창시자, 세계10대 문화명인 중 하나, 공자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숭상받고 성인으로 받들고, 사후 이곳에 장례지냈고, 공씨의 시조이다.
참배를 마치고 향나무 가로수가 있는 돌아나오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손길은 하늘을 넘는 것은 아니고 단지 하늘 아래에 더불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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