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여행/중국(태안, 곡부, 칭따오)

공림 관람: 만고장춘방(萬古長春坊)에서 우씨방(于氏坊)까지

by 仲林堂 김용헌 2019. 6. 7.

일행은 공부 관람을 마치고 나와 공림(孔林)행 셔틀버스에 승차했다. 버스는 공부에서 공림까지 1km쯤 달려 일행을 만고장춘방(萬古長春坊) 입구에 도착했다.

 

도로 중앙은 보도가 있고 그 양쪽으로 관목(灌木)과 측백나무 고목이 연이어 있고, 관목화단 밖 양쪽에 도로가 있는 길이다. 중앙에 있는 길은 예전에는 대성지성선사공자신도(大成至聖先師孔子神道)라고 했다고 한다. 신도(神道)라 일반은 갈 수 없는 길이나 신도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없고 그 길을 다니지 못하게 하는 사람도 없다. 수 백년 된 측백나무 고목은 말없지만 방문객에게 역사의 숨결을 줬다.

 

다음 볼거리를 기대하며 일행은 만고장춘방(萬古長春坊)에 도착했다. 돌기둥 6개가 있고, 그 사이에 5개의 문이 있고, 그 위에는 돌 지붕의 거대한 석물이 있다. 이 방은 명대 1594년에 세웠다고 한다. 중앙에 사자상이 방문객에 위엄을 준다. 이런 사자상과 용 형상의 돌기둥은 북경 13릉과 이곳에만 있다고 한다. 만고(萬古)에 장춘(長春)이라니 언제나 청춘이라는 뜻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청춘과 같이 언제나 역동적이며 끝이 없다라는 는 뜻이다.

 

측백나무 고목의 신도는 끝나고, 광장 끝에 공림의 정문인 대림문(大林門)이 멀리 보인다. 가까이 가니 누각 아래에 큰 글씨로 "至聖林"이라고 쓰여 있다. ()은 원래 숲이지만 이곳에서는 묘지(墓地)에 나무가 자라도록 해 묘() 대신 림()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 가 싶다. 지성(至聖)은 공자를 가리킨다.

 

대림문에서 337m지점에 거대한 이림문(二林門)이 앞을 가로 막는다. 이림(二林)은 공림의 두 번째 문이라 뜻이다. 붉은 칠을 한 높은 담 위에 2층 누각이 있다.

 

대림문을 통과 하자 묘지가 나오기 시작한다. 공림은 도보로 둘러 볼 수도 있으나 규모가 커서 대부분 소형전동셔틀카를 탄다. 우리 일행도 승차권을 구입하고 그 셔틀카를 탔다.

 

이곳을 오기 전 공림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니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공림은 취푸시 북문 밖에 있으며 성림(聖林)이라고도 불린다. 공자와 그 후손들의 전용 묘지이다. 공자 직계 후손의 묘가 10만여 기가 있다. 숲 속에는 수많은 묘비가 있고, 소나무가 울창하고 10만여 고목이 있다. 4,000기 이상의 비석이 있고, 3,000기 이상의 무덤이 있다. 공림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되고, 보존 상태가 훌륭한 가족 묘지이다.

공림(孔林)의 시작은 공자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이며, 공자를 뒤이어 이 곳에 장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계속해서 늘어남으로써 공림(孔林)의 면적도 점차 늘어났다. 총면적 약 183.33헥타르이고 둘레는 5.6이며, 담장의 높이는 3m, 두께 1m이다."

 

우리가 탄 셔틀카는 이림문(二林門)을 지나 동평교(東平橋)를 지난다. 곧장 공자묘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난 청묘군(淸墓郡) 방향으로 간다. 공림의 동쪽에는 청대 묘가 있는 청묘군(淸墓郡)이 있고, 서쪽에는 명대 묘가 있는 명묘군(明墓郡)이 있다. 수많은 묘가 숲속에 있다. 그 수 많은 봉분 중 잔디가 있는 봉분은 하나 없었다. 최근에 매장한 것으로 보이는 묘를 보니 맨 흙으로 봉분을 쌓고 우리와 달리 잔디를 심지 않았다. 비석이 없는 묘도 많고, 비석의 모양이나 크기도 각양각색이다.

 

셔틀카는 한 묘소 앞에 정차를 한다. 공자의 64대손 동당(東塘) 공상임(孔尙任)의 묘다. 묘비에는 "奉直大夫 戶部廣東淸司員外郞 東塘 先生之墓"이다. 봉직대부(奉直大夫)는 벼슬의 품계이고, 호부광동청사원외부(戶部廣東淸司員外郞 ) 관직 이름이다. 더 풀이하면 호부(戶部)소속이며 광동(廣東)은 지역이며 청() 나라 때 사원외부(司員外郞)라는 벼슬이다. 동당은 그의 호이다. 운전기사가 이 비석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데 바로 알아듣지 못했으나 나중에 찾아보니 그는 청대 최고의 희곡 작품 "도화선(桃花扇)"를 쓴 희곡작가였다.

 

강희제가 청이 중국을 제패하고 처음으로 곡부에서 1682년 제사 지냈다. 그 때 공상임(孔尙任)은 강희제를 안내하고 대학을 강독했다. 그 강독에 감명받은 강희제는 파격적으로 공상임을 국자감박사로 승진시켰다. 그는 북경으로 가서 벼슬길로 올랐고, 다시 지방으로 나가 토목 일을 맡았으나 관리의 부정을 보고 실망했다. 그는 새 왕조를 찬양하다가도 명 왕조를 추모했다. 권력에 아부하다가 명의 유민과 친목을 유지하는 등 의롭기도 했다. 그는 강희(康熙) 39(1700) 면직을 당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 10여 년에 걸쳐 작품 도화선을 완성했다.

 

어느 인생이라고 사연이 없겠냐? 마는 다음에 찾은 우씨 묘(于氏 墓)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청나라 황제며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는 공자를 아주 숭상하여 공자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고자 했다. 그래서 한족인 대학사(大學士) 우민중(于敏中)의 딸을 자신의 수양딸로 삼게 한 뒤 공자의 72대손 공헌배(孔憲培)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 때 싸 보낸 것이 6대가 함께 사이좋게 먹으라는 엿이다(六代含飴糖). 우씨방(于氏坊)은 건융제의 손자 도광제(道光帝)가 세운 건물이다.

 

전동카는 이내 공림의 숲속을 달린다. 이곳이 공동묘지라고 하지만 어두운 마음은 하나 없고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기분이다. 차는 바로 공자묘 입구 동평교 앞에 도착한다.

 

 

 

정면에서 만고장춘방이다. 석조건물이 규모가 대단하다. 앞에는 사자석상이 있고, 중앙 두 기둥은 용석상이 있다. 돌기둥 위에 있는 누각도 돌이다.

 

 

 

뒤에서 본 만고정성방이다. 우리 일행이 이 문을 지나 대림문을 향해 걸어 가고 있다.

 

 

공자 신도가 끝나면 대림문 앞에 넓은 광장이다.

 

 

대림문(大林門)에는 지성림이라고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성문이라고 혼동하기 쉬울 것 같다. 2층 누각이 균형 잘 잡힌 모습이다. 문 앞에 큰 사자석상이 있다.

 

 

후면에서 본 이림문(二林문)이다. 이림문을 지나 공림 묘가 있다. 이곳에서 공자묘 입구까지 우리 일행은 셔틀전동차를 탔다.  

 

 

한 셔틀전동차가 우리가 탄 차를 뒤 따라온다. 우리가 탄 차와 같은 차다. 사방은 오픈되어 있다.

 

 

숲속에 묘가 보이고, 비석도 보인다.

 

 

동당 공상임의 묘다. 비석에는 奉直大夫 戶部廣東淸司員外郞 東塘 先生之墓라 적혀 있다.

 

 

건융제의 양녀 공주 우씨 묘를 안내하는 우씨방이다. 우씨방 중앙 돌기둥 사이로 난 길이 우씨신도이다.

 

 

우씨방 안내판이다. 청나라 도광(청 5대황제) 5년(1825년)에 세웠다. 우씨는 대학사 우민중의 딸로 공자의 72대손 연경공 공헌배의 처이다. 건융제의 수양 딸이 되었다. 등 내용이 있다.

 

 

도광황제가 그의 조부인 건융제를 숭조하여 우씨방을 세웠다. 도광 황제의 유언 현판이 우씨방 중앙 있어 눈길을 끈다. 우리 일행이 탄 차는 잠간 스톱했다 움직여 사진을 바르게 찍지 못했다.

 

 

공림에는 수 많은 석상이 있다. 그 중 일부다.


공림 안내지도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