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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족 이야기

폐가가 된 나의 고향 집

by 仲林堂 김용헌 2018. 1. 15.

무엇이든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나 자랑스런 나의 고향집이 폐가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니 쓸쓸하지 않을 수 없다. 어제는 아버지 제사라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을 찾았다. 우리 집은 5칸반짜리 함석집이다. 본래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양촌(인내라는 마을)에서 초가 고택을 구입하여 그 목재로 집을 지었다. 이 집을 지을 당시에 뒷집도 그 해에 기와 고택을 구입하여 그 목재로 지었다. 초가 대신에 우리집은 함석을 올렸고, 뒷집은 원형 그대로 기와집을 지었다.


당시 부인리 1구 40여호, 부인리 2구 60여호, 부인리 20여호 중에서 기와집은 뒷집 하나, 함석집은 우리집 하나뿐이었으며 모두 초가집이었다. 우리집을 오시는 분마다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가세가 점점 좋아지면서  앞집 상호네 집을 매입하여 헐어 울안으로 만들었고, 옆집 종덕이네 집을 또 매입하여 일자형의 별채(곡간 2칸, 재간 1간, 화장실 1칸)를 지었다.


형이 제급나기 전에는 농사도 부적면에서 가장 많이 지었으며, 오고 가는 손님도 많았다. 그런 집이 아버지가 2003년 1월 1일 13시 50분 돌아가시고 어머니 홀로 집을 지켰다. 그 후 어머니께서 선우행복요양원으로 가시고부터 빈집이었고, 2015년 7월 22일 돌아가신 이후도 빈집이었다. 특히 화재가 나 겨우 진화는 했으나 피해가 커 숙박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폐가가 되었다.   



초록 양철 지붕의 좌측편이 부억과 헛간이 있는 자리이나 화재로 피해받았고 복구하지 않았다.


사랑채이다. 안채를 짓기 전부터 사랑채가 있었다. 안채를 짓기 전 사랑채에는 사랑방이 있었고, 대문과 오양간이 있었다. 본래 사랑채는 북쪽(우측)부터 외양간, 대문, 사랑방, 창고가 있었으나 외양간은 별채로 옮겼고, 대문은 안채의 동남쪽에 새로 냈다.  


뒤(북쪽)에서 본 우리집이다. 무너진 뒷담 넘어로 우리집이다. 우리집은 앞은 확 터져 있으나 뒤는 너무 좁다. 담장 아래로 작은 똘이 있었다.


안채의 기둥과 석가래이다. 동생들이 이사하면서 방안과 대청에는 버려도 되는 이사짐이 가득하다.


대청의 천정이다.


서쪽에서 본 우리집 담장이다.


사랑채 천정에 걸린 옛 문이다.


대청 마루이다. 마루는 쪽 마루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어 하나 하나를 뺄 수 있게 되어 있다. 지하에 물건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우리 어머니께서 시집 오실 때 해온 농이다.


장독이다. 늘 어머니께서 걸레로 닦으시고 애끼었던 장독이다.


소쿠리 하나가 뒤방벽에 걸려 있다.


풍구다.


부엌에 걸린 체다.


탈곡할 때 사용했던 호롱개이다. 풀이 호롱개를 덮처 있어 죽은 풀을 뜯어 내고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회갑 때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첩은 안방 농 위에 먼지로 덮여 있었다.


아버지의 젊으셨을 때 사진이다.


아버지 회갑 기념 가족 사진이다. 아버지 5형제 내외, 나의 형제와 사촌, 손자와 손녀 등 45명이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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