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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중국(낙양, 소림사, 정주)

염제(炎帝)와 황제(黃帝), 대우(大禹)

by 仲林堂 김용헌 2015. 10. 25.

황하풍경구에는 우리나라의 단군 임금같은 분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 두 분이 있고, 치수를 하여 백성을 잘 살게 한 우임금이 있다. 우 임금은 높여 대우(大禹)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들과 버금가는 인물로 모택동 동상이 있다.  아래 사진은 황하풍경구 박물관에 게시한 염황이제와 대우 간판이다. 

 

아래 박물관에 안내한 글을 보면 이 석상은 높이가 106m로 미국의 자유여신상 보다 8m가 높고, 러시아의 어머니상보다 2m가 높은 석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상 중 하나라고 쓰어 있다. 그러나 하남성 루샨 불천사에 있는 불산금불은 153m로 세계 최고 조각상이다.

 

사진은 황하풍경명승구에 세운 염제

(炎帝)

와 황제(黃帝)의 석상이다.

 

신농씨는 화덕(火德)으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염제(炎帝)라고도 하는데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외에 음악과 한약(漢藥)을 전해준 신이자 상업을 창시한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황제(黃帝)는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이다. 세계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도 중국의 역사를 황제부터 기술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사마천은 황제를 삼황의 일원이 아닌 오제의 일원으로 보았으며 삼황까지는 神話時代신화시대로 간주해 역사서술에서 제외하고 황제부터 본격적인 역사 기록이 시작된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황제의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이 헌원(軒轅)으로 백성들에게 곡식을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하며 이외에 문자와 음악, 한의학, 도량형 등을 창조했다고 전해진다.

 

염제(炎帝)와 황제(黃帝) 석상이다. 그 아래는 신하들의 임금을 알현하는 형상이 있다. 중국 다웁게 석상도 엄청 크고 알현하는 장소도 엄청나게 넓다. 

 

 

제향을 피우는 곳에서 바라 본 두 임금의 모습이다.

 

 

더 멀리서 본 두 임금 상이다.

 

 

오룡봉에서 본 두 임금의 석상이다.

 

 

신하가 임금을 알현하는 모습이다.

 

 

신하의 모습이다.

 

 

좌우에 향로도 엄청나게 크다.

 

 

 

우임금이 황하의 치수를 하였다고 칭송하는 석상과 우임금의 사진이다.

 

대우(大禹), 성은 사(姒)요 이름은 문명(文命)이다. 『사기․하본기』에 따르면, 전욱(顓頊)의 손자이며 곤(鯀)의 아들이다. 요(堯)임금의 치세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섭정인 순(舜)이 그에게 치수(治水)를 명령했다. 13년 동안 노심초사한 끝에 치수 사업에 성공해 천하를 9주(州)로 나누고 공부(貢賦)를 정했다.

순이 죽자 인망을 얻은 그가 제위를 계승했는데 나라이름을 하(夏)로 고치고 안읍(安邑)에 도읍했다. 치세 10년 만에 회계(會稽)에서 죽자 제후의 추대로 아들 계(啓)가 천자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천자 자리를 세습화하여 하 왕조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소흥(紹興)에 무덤이 있다. 그의 전설은 한족의 홍수 전설과 관련이 있으며, 신화학과 고대사학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우(禹)는 중국의 전설의 시대에 요(堯), 순(舜)과 함께 거명되는 성왕이다. 그의 가장 탁월한 공적은 역대이래로 칭송을 받고 있는 치수다. 전설 속 중고시대는 홍수가 중원지역을 위험에 빠뜨렸다. 요순도 성군이기는 하였으나 홍수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우임금 때에 이르러서야 치수에 성공하였다. 막힌 수로를 소통시키는 방법으로 홍수를 다른 강과 바다로 흐르게 하여 중원지역에 복을 내렸고 만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공적으로 말미암아 순임금의 계승자가 되었다. 대우가 치수하였다는 일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믿었고 그 일에 대해 회의를 품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심지어 사마천(司馬遷)조차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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