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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성삼문의 유허비

by 仲林堂 김용헌 2014. 9. 22.

매죽당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군 노은동 외가에서 1418년 태어났다.  나이 21세의 약관에 1428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세종29년 1447년에는 중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음며 집현전 학자로 에 한글창제 공이 컸다.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았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충절을 길이는 움직임은 끊임 없이 이어져 왔다. 김종직, 홍섬, 이이 드은 그의 충절을 논했다.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충신으로 꼽혔다. 마침내 숙종17년 1691년 관작이 회복되었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깊이 감복한 한 의사(義士)가 시신을 거두어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었다고 한다. 그곳이 현재 노량진 사육신 묘역이다. 한편 그의 시신이 전국을 돌면서 전시할 때, 다리 하나(一肢)가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번지에 묻혀 있다.

 

매죽당의 다리 하나가 충남 논산에 왜 묻혔을 가? 이에 관한 고증은 없어 그 연유를 밝히고 자 한다. 능지처참당한 죄인의 시신을 감히 묻기란 쉽지 않했을 것이다. 그는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승을 비롯하여 동생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 아들 맹첨(孟瞻), 맹년(孟年), 맹종(孟終)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혈손이 끊기고 아내와 딸은 관비(官婢)가 되었다. 직계자손은 모두 멸족을 당하여 시신을 거둘 수 없었고, 아마도 외가에서 시신을 거두웠을 것으로 예상된다. 성삼문의 외가는 충청남도 홍주군 노은동으로 현재 주소로는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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