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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논산 충곡리 한양말에 있는 성삼문선생 유허지비

by 仲林堂 김용헌 2014. 10. 4.

조선의 충신으로 알려진 성삼문선생문은 외가인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서 1418년 출생하였다. 홍성 노은리에는 창녕성선생유허지비(昌寧成先生遺墟址碑)가 있다.

또 다른 성선생의 유허지비가 충남 논산에 두개가 있다. 하나는 부적면 충곡리 충곡서원에 있고 다른 하나는 충곡서원에서 약 2km서쪽 충곡리 한양말에 있다. 충곡서원 성선생유허비(우암 송시열 지음)에 한양촌이라는 곳이 성선생의 별장이 있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양촌은 “한양말”이라고 부르고 있다. 얼마 전 이 마을 출신 지인으로부터 한양말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고 그 은행나무가 있고 그 옆에 집한채가 아마 선생이 별장터일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는 한양말을 찾았다. 겨우 차가 한대 지날 정도로 좁은 포장도로를 타고 언덕 위로 오르자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마을이 있었다. 마을 입구 쪽에 6-7가구가 있고 마을 회관이 있는 곳 남쪽 편으로 5-6호가 있었다. 마을 회관 쪽으로 지나면서 둘러보니 큰 고목이 2그루가 보였다. 하나는 은행나무로 수령480년 되었다며 1998년 12월1일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다른 하나는 느티나무로 은행나무보다 20년 더 오랜 된 나무로 역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마을회관에 주차를 하고 은행나무가 있는 집으로 갔다. 그 집에서 두 사람이 마당에서 공사작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사드리고 이 마을에 대하여 여쭤보니 자기들은 모른다며 이원국(李元國)씨가 잘 안다면 그가 사는 집을 가르쳐 준다. 이원국씨네 집으로 찾으니 그는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성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왔다고 하자 같이 은행나무에 성삼문비석 있다면서 그곳에 가서 이야기 하자고 한다.

 

다시 찾은 은행나무 아래에는 창녕선선생유허비가 있었다. 이 비석 전면 큰 글씨는 잘 보였으나 뒷면에 암각한 글씨는 마모되어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이 비석은 1767년(숭정46년, 정해년) 이세옥, 이해관, 김진수이 세웠다는 글자가 보였다. 충곡서원 선생유허지비를 보면 이 마을은 성삼문선생이 살았던 곳이고 충곡서원이 있는 자리는 성삼문선생의 조상의 묘가 있었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삼문 선생의 1지묘(肢墓 : 4지 중 하나가 있는 묘)가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 있고, 우암 송시열이 지은 유허비가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충곡서원에 있고, 또 하나의 유허비 성선생의 별지로 알려진 이곳 충곡리 한양말에도 있다. 이렇게 논산은 성삼문 선생과 관련이 많은 고장이다. 한양말 유허비는 사진의 왼쪽 끝에 공사자재 옆에 외롭게 있었다. 사진에 있는 분은 이원국씨이다.

 

한글창제에 큰 역할을 하였고 충신으로 알려진 성삼문선생은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우암 송시열은 "성선생유허지비"에서 이곳 연산은 추노지속(鄒魯之俗 : 맹자는 추나라가 고장이고, 공자는 노나라가 고장으로 맹자와 공자의 풍속이 있는 곳)이라며 이 고장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논산의 성선생 유허비는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고 있어 안타까웠다.

 

은행나무 왼쪽 끝 자재 쌓아놓은 곳 옆에 비석이 있다.

한양말에 사시는 이원국선생께서 이곳 비석을 안내해줬다.

비석 전면 글자는 볼 수 있으나 뒷면에 있는 글은 마모되어 전혀 알아 볼 수 없었다.

 

齊任 이세옥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 세분이 이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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