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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반구정(伴鷗亭)를 찾아서

by 仲林堂 김용헌 2025. 5. 3.

반구정은 임진강이 바라 보이는 언덕에 있다.
선생께서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반구정(伴鷗亭)이다.

 

반구정 바로 옆에 있는 우러러 보는 곳이란 뜻의 정자 앙지대(仰止臺)이다.
앙지대의 현판은 유명한 김충현 선생이 썼다.앙지(仰止)란 이름은 백성이 우뚝하게 산과 같이 처다 본다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방촌기념관에 있는 선생의 글이다. 법이라는 것은 만세의 공공의 그릇이지 일시의 가벼운 기술로 될 수 없다 (法者萬世公共之器 不以一時之術輕改之也) .사람이 효도를 다하지 못하면 온갖 행실이 다 무 너져 忠으로 옮겨갈 근본 바탕이 없어진다 (人不盡孝則百行俱喪 無以爲移忠之本) ,

 

수원향교에서 논어공부를 함께 하며 만나 붕우가 된 일행은   4월 29~30일 유학 선각자들의 유적을 찾아 파주, 연천, 철원으로  여행을 떠났다. 첫번째 방문지는 오두산성과 오두산전망대다. 외국인 관람객이 몇 있었지만 한적하다. 전망대에 오르니 북쪽으로 임진강 건너 북한 땅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서쪽 한강 너머로 김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손에 잡힐듯 가까이 보이나 발길이 끊긴지 70여년이 넘었다. 언제나 저 땅에 갈 수 있을 까? 분단의 아품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내려와 찾아간 곳은 반구정이다. 반구정(伴鷗亭)은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운 정자로 낙하진과 가깝게 있어 원래는 낙하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위키백과는 반구정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반구정은 황희가 죽은 후 조상을 추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크게 고쳐 지었다. 건물 규모는 앞면 2칸·옆면 2칸이며 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 반구정 옆에 또 하나의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앙지대(仰止臺)이다.  1452년(문종 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년(세조 1)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반구정 옆에 앙지대(仰止臺)와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방촌기념관에는 선생의 일대기를 비롯한 선생의 삶과 사상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 눈길을 끄는 방촌선생의 "네말도 옳고, 네말도 옳다"라는 선생의 아래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하루는 선생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선생 집안 어린 종 둘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상대방이 잘못해서 싸움을 벌렸다고 말했다. 그를 다독여 보낸 후 다른 종의 자치지종을 다 듣고 "네말이 옳다"라고 말했다. 이 때 방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인이 "아니 대감께서는 이 놈도 옳다, 저놈도 옳다고 하십니까?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해 주셔야지요?"라고 말하자 선생께서는 "부인이 말씀도 참으로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황희 정승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이 이야기에서 볼 수있는 대화이다. 이와 같은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 영의정을 19년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반구정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꽤 넓다. 정자에서 갈매기를 벗하며 반구정에서 여생을 보내셨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정자는 멋이 들어 있다. 정자에서 선생은 떠나신지 갈매기의 꿈을 꾼다. 

반구정과 앙지대 이외에도 방촌 선생 기념과, 영당지 등 여러 건물이 많다.

현판은 방촌선생영당이라고 초서체로 써 있다.
방촌선생 영정과 제상, 향탁, 향로가 보인다.
방촌선생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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