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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제주 한달살이

가파도 마을회관 앞 가파도 역사비

by 仲林堂 김용헌 2023. 12. 30.

 

가파도 남쪽 가파포구 근처 마을회관 앞에 '가파도 개경 120주년 기념비'와 김태능이 세운 비가 있다. 김태능의 비는 그 내용이 가파도의 역사 사실을 한글로 기록하고 있으나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고 어려운 단어가 있어 이해하기 어려워 그 내용을 아래에 다시 풀이한다.

 

 

[김태능이 쓴 가파도 기록 비문]

이 섬 옛 이름은 개도, 개파도, 가파도, 가을파지도, 더위섬이라 불렀고, 처음에는 나라에서 소와 말을 기르는 목장지로써 이조 성종 때 1469년 임금이 타시는 양마를 산출한 곳이다. 영조 261750년 나라에 바치는 희성 진공용 소 50마리 방목한 이래 헌종 6

 

1840년 영국선이 내박하여 축우마를 총을 쏘아 잡아간 후 폐우장이 되었다. 8년 임인년 1942년 이광렴 주관으로 개경 허가받아 상하 모슬리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개간 경작하기 시작하고부터 나라에 납세하였다.

 

철종 말경 1863년 이 섬에 소와 쟁기로 밭 가는 법이 들어오면서 주민이 살기 시작했다. 1885년 을유 일본 사람 잠수기선 업자 길촌흥삼랑(吉村興三郞)이 일행이 정착하면서 입어 후 우리나라 잠수기 어업이 발달한 시초 지이다.

 

뒷 해 병술년 1886吉村興三郞이 일본에서 고구마 종자를 도입하여 재배법을 전수받아 보리 유지 金龍興 역시 근세 제주도 고구마 재배를 장려했다. 1914년 하모리 소관에서 분리되어 가파리라 부르고 있다.

 

교육은 고종 초 1863년부터 한문 훈학 시작해서 학자와 지식인들이 배출되었다. 신유년 1921金成淑 의원 주관으로 신유의숙학교 창설, 1947년 가파초등학교 창립 인계하고 1823년 항개 서방파제를 리면의 협력으로 축성, 1936년 연해 어업 멸치, 자리, 어로법 도입 우리 조상님들이 연구 개발하여 오늘과 같이 제주도 멸치, 자리, 어로법이 발달한 시초지이다.

 

증거를 대여 설명한 사람

사학가 김태능

 

[김태능이 쓴 가파도 기록 비문 풀이] 

가파도는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섬으로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렸다고 했다. 개파도, 가파도, 가을파지도, 더위섬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가파도라고 불리고 있다. 가파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69년임금이 타는 말을 '양축을 산출한 곳'이라고 했다. 임금이 타는 말을 기르는 곳으로 이라는 뜻이다. 영조 26년 1750년 나라에 바치는 '희성 진공용 소'라는 말은 제사 지낼 때 어떤 흠집이 없는 순수한 소를 제물로 바치는 소라는 뜻이다. 

 

"1840년 영국 선박 사마랑호가 침입하여 이 섬에서 기르던 말을 총으로 쏘아 잡아 간 후에 말은 더 이상 사육하지 못했다."라고 비문에서 말하고 있다. 

 

이곳에서 사람이 처음 살게 된 것은 1863년 쟁기로 밭 가는 법이 들어오면서 주민이 살기 시작했다고 했다. 1863년은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이다. 이 비석 옆에 세운 비석 '가파도 개경 120주년 기념비'를 보면 이곳에  임인년(1962년)으로 그 때부터 120년전이면 1842년이 된다. 1842년은 지금으로부터 181년이 된다. 181년 전  서기 1842년에 이곳에 모슬포에 살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처음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본인이 이 섬에 1886년 이주하여 고구마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재배하여 이곳 마을 사람들이 고구마 재배를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고구마는 1763년 조엄이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고구마의 종자를 가져와 최초로 고무마재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섬에 고구마 도입은 1763년 보다 123년 뒤에 도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섬에서 교육은 1863년으로 보고 있다. 1921년 일제 강점기에는 의숙학교로 보통학교와 비슷한 학교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방파제가 1823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63년 쟁기로 밭 가는 기술이 들어오면서 이 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이보다 40년 전 방파제가 만들어졌다고 하니, 믿기 어렵다. 아마 방파제는 1923년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은 잠수기술을 가진 일본인이 이 섬에 들어와 잠수하여 고기를 잡는 기술을 보급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일본은 어업 선진국으로 보인다. 그 잡수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해녀가 물질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던 게 아닌 가 싶다.

 

멸치와 자리 잡는 기술이 이곳 어부들이 개발한 기술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가파도 어부들에 의하여 갈치, 멸치, 자리 등 고기잡는 기술이 발전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태능씨의 글은 본인이 사학자라고 자칭하고 있으나 이 비문에서 기록한 내용이 근거를 알 수 없고, 다분이 주관적인 기록으로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기록이 어느 정도는 사실일 수 있어 무시할도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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