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위키에서는 용주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뒤주에서 죽은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정조가 명을 내려 용주사가 창건되었다. 정조가 재위 13년(1789)에 옛날 수원부 읍치(현재 화성태안3지구)를 현재의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사도세자의 묘를 새로 조성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붙였다.
이듬해 정조 14년(1790)에는 현륭원에서 가까운 갈양사의 옛 터에 새로이 절을 지었다. 특기할 점은 용주사 창건이 정조가 직접 명하여 국가공사로 이루어졌으며, 비용도 각 궁가와 중앙 및 지방의 관가로부터 충당하였다는 것이다. 숭유억불이 기본인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이다. 전설에 따르면 절 건물이 낙성되던 날 밤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입에 구슬을 물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정조는 (용은 임금의 상징이므로) 왕이 되지 못하고 죽어 구천을 떠돌던 아버지가 비로소 한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절 이름을 용 용(龍) 자에 구슬 주(珠) 자를 써서 용주사(龍珠寺)라고 지었다 한다.
"용주사 외삼문 주련"을 검색하니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삼문의 현판은 용주사(龍株寺)이고, 주련의 첫글자가 용주사불(龍株寺佛)입니다.
주련 밑의 표시로 보아 晶海스님이 지으신 것인가 싶습니다.
龍蟠華雲(용반화운)
- 용이 오색구름에 웅크리고 있으니
珠得造化(주득조화)
- 여의주를 얻어 조화가 무궁하다.
寺門法禪(사문법선)
- 사문의 법은 선종이니
佛下濟衆(불하제중)
- 부처님 하계에 내려와 중생을 제도하신다. [출처] [경기]화성_용주사|작성자 PnD 언젠간
"명고축출사건"은 불교유신회원들이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을 단죄한 사건이다.
이들은 강대련에게 작은 북을 등에 메게 하고 "불교계대악마강대련명고축출"이라는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면서
남대문에서 종로 네거리를 지나 동대문까지 행진하였다.
이 행진에는 유신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방에서까지 올라 온 회원 백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 급보를 접한 종로경찰서는 10명의 경찰을 출동시켜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모자 5명을 연행하였다.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귀속시키려 했던 강대련을 뜻을 같이한 도반들과 ‘대망신’ 시켰던 것이다.
본산주지회의에 참석하려는 강대련을 체포해 종로거리를 돌면서 북을 치고 ‘불교의 악마’라며 각성과 참회를 촉구했다.
당시 문성스님을 비롯한 젊은 스님들은 강대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본사 소임을 보고, 일본인들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겠지만,
조선불교를 왜국에 넘기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조선불교를 망치려는 ‘불교의 악마’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곧바로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스님들은 전원 연행했고,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된 문성스님은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문성스님은 1922년 33본산 주지연합의 주요 인물이자 친일승려인 강대련을 쫓아내는 ‘명고축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사건 주모자들은 실형을 선고받기까지 했지만,
주지 강대련(姜大蓮)은 일제에
“나는 이 정도 일로 겁을 먹을 인물이 아니오.
내가 이처럼 철저하게 뼛속까지 친일(親日)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시오!”라고 하며
오히려 자기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기회로 여겼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교육·포교사업과 교계의 운영을 민주적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불교유신회의 개혁요구 사안에 대하여 강대련이 번번히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총독부 권력과 타협한 용주사 주지의 전횡을 단죄한 이 사건은 일제시대 불교계에 길이 남는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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