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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용주사(龍珠寺) 답사

by 仲林堂 김용헌 2023. 7. 2.

나무위키에서는 용주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뒤주에서 죽은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정조가 명을 내려 용주사가 창건되었다. 정조가 재위 13년(1789)에 옛날 수원부 읍치(현재 화성태안3지구)를 현재의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사도세자의 묘를 새로 조성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붙였다.

이듬해 정조 14년(1790)에는 현륭원에서 가까운 갈양사의 옛 터에 새로이 절을 지었다. 특기할 점은 용주사 창건이 정조가 직접 명하여 국가공사로 이루어졌으며, 비용도 각 궁가와 중앙 및 지방의 관가로부터 충당하였다는 것이다. 숭유억불이 기본인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이다. 전설에 따르면 절 건물이 낙성되던 날 밤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입에 구슬을 물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정조는 (용은 임금의 상징이므로) 왕이 되지 못하고 죽어 구천을 떠돌던 아버지가 비로소 한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절 이름을 용 용() 자에 구슬 주() 자를 써서 용주사(龍珠寺)라고 지었다 한다.

 

 

이 문에 도착하면(到此門來)

 

지혜가 있다고 마라(莫存知解). 막존지해에서 뿔각(角)변에 양(羊)은 해(解)의 옛 글자이다. 용주사의 홍살문 앞에 있는 돌기둥에 쓴 글씨는 "여기에 오면 아는체 하지 마라"라고 말하고 있다.
사찰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용주사효행박물관이다.
외삼문이다.

"용주사 외삼문 주련"을 검색하니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삼문의 현판은 용주사(龍株寺)이고, 주련의 첫글자가 용주사불(龍株寺佛)입니다.

주련 밑의 표시로 보아 晶海스님이 지으신 것인가 싶습니다.

龍蟠華雲(용반화운)

- 용이 오색구름에 웅크리고 있으니

珠得造化(주득조화)

- 여의주를 얻어 조화가 무궁하다.

寺門法禪(사문법선)

- 사문의 법은 선종이니

佛下濟衆(불하제중)

- 부처님 하계에 내려와 중생을 제도하신다. [출처] [경기]화성_용주사|작성자 PnD 언젠간

외삼문 현판이다.
외삼문을 지나면 천보루가 행랑을 거느린 5칸 2층 건물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천보루(天保樓)이다. 하늘이 보호하는 누각이란 뜻이다.
천보루 앞에 있는 5층 석탑이다. 고려시대 탑으로 보물로 지정할 만하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 탑의 출처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천보루를 지나면 사찰의 중심 건물인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다. 그 우측에 호성전이 보인다.
한동민 박사는 천보루에서 정조가 이곳을 찾았을 때 가마를 타고 가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당간지주가 앞에 있고, 그 뒤에 정료대가 보인다.
야간 불사에 불을 피우는 자리인 정료대(庭燎臺)이다.

 

대웅보전에 안치한 삼존불이다.
법고각(法鼓閣)이다.
정조의 아버지와 어미니 신위를 모신 호성전(護聖殿)이다. 호성이란 성인을 보호한다란 이름이다. 호성전은 모두 불탔지만 정조의 위패를 당시 국립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어 온전했다고 한다.
국보 제120호가 있는 범종각이다.
주변이 지저분하여 깔끔하게 청소가 필요하다.
호성전에 모신 사도세자(장조)와 그 비, 정조와 그 비(혜경궁홍씨) 위패이다.

 

고종 때 황제로 추존하여 사도세자는 장조의황제가 되었고, 정조는 정조선황제로 추존된 위패이다. 황제 옆에 황후의 위패도 같이 있다.
수 많은 위패가 빼곡하게 보인다.
호성전에 모신 수 많은 사람들의 위패가 보이고, 앞으로 채우게 될 위패가 놓일 자리가 검게 보인다.
용주사 대웅보전에 석가래 아래에 있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보인다.
강대련 주지의 행적을 적은 글이 천보루 안쪽 벽면에 있다. 강대련은 일제강점기 용주사의 주지로 친일파로 용주사에서 정조의 흔적을 지우기한 인물이다. 그에 관하여 카페 '으름나무 발자국'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스님이면서 6남 2년 자녀 이름까지 기록에 새겨 놓았다.

"명고축출사건"은 불교유신회원들이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을 단죄한 사건이다.

이들은 강대련에게 작은 북을 등에 메게 하고 "불교계대악마강대련명고축출"이라는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면서

남대문에서 종로 네거리를 지나 동대문까지 행진하였다.

 

이 행진에는 유신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방에서까지 올라 온 회원 백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 급보를 접한 종로경찰서는 10명의 경찰을 출동시켜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모자 5명을 연행하였다.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귀속시키려 했던 강대련을 뜻을 같이한 도반들과 ‘대망신’ 시켰던 것이다.

본산주지회의에 참석하려는 강대련을 체포해 종로거리를 돌면서 북을 치고 ‘불교의 악마’라며 각성과 참회를 촉구했다.

 

당시 문성스님을 비롯한 젊은 스님들은 강대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본사 소임을 보고, 일본인들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겠지만,

조선불교를 왜국에 넘기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조선불교를 망치려는 ‘불교의 악마’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곧바로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스님들은 전원 연행했고,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된 문성스님은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문성스님은 1922년 33본산 주지연합의 주요 인물이자 친일승려인 강대련을 쫓아내는 ‘명고축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사건 주모자들은 실형을 선고받기까지 했지만,

주지 강대련(姜大蓮)은 일제에

 

“나는 이 정도 일로 겁을 먹을 인물이 아니오.

내가 이처럼 철저하게 뼛속까지 친일(親日)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시오!”라고 하며
오히려 자기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기회로 여겼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교육·포교사업과 교계의 운영을 민주적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불교유신회의 개혁요구 사안에 대하여 강대련이 번번히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총독부 권력과 타협한 용주사 주지의 전횡을 단죄한 이 사건은 일제시대 불교계에 길이 남는 사건이 되었다.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된 용주사 오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용주사 입구 사천왕문 뒤 효박물관 앞 정원에 있다.
용주사 대웅보전 앞에서 일행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앞 줄 좌측에서 3번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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