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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킴(지정 미지정)

축만제 축조 후 대한민국 농업의 요람이 된 서둔(西屯)벌

by 仲林堂 김용헌 2022. 7. 23.

항미정(杭眉亭)

- 화성유수 박기수가 1831221일 화성유수에 임명되어 이듬해 1832년 윤94일 대사헌으로 이임하기까지 11개월간 재임하면서 항미정을 창건

항미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구에서 "서호는 항주의 미목(眉目) 같다"고 읊은 데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순종황제가 1908102일 기차를 타고 수원 능행을 하였을 때, 융건릉 참배 후 서호 임시 정거장에 도착하여 축만제 뚝방길을 지나 항미정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쉬었던 곳이다. 이날 소네 부통감이 배종했다.

이등박문: 1907326일 호세가와 대장 전별하기 위해 찾았다.

- 우까기 총독: 1932526일 방문 기념촬영

- 소련의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 항미정에서 1933년 기념촬영

서호구국민단 결성지: 수원 출신 학생들이 모여 19206월 수감된 독립운동가 가족을 구조할 것을 목표로 세우고, 독립운동 선전활동을 하다고 일제에 발각되어 박선태와 이득수는 2년 선고를 받았다.

항미정

 

축만제(祝萬堤):

-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이다.

- 179810월 시작하여 17995월 완공

나혜석의 그림 수원 서호

일제강점기 관광의 명소로 알려짐

축만제에서 D. S. 조든과 C. W. 메츠가 발견한 서호납줄갱 1마리는 전 세계에서 처음 발견된 신종으로 1911년 보고되었다. 2007년 일본 히로시시마현 후꾸야마시로부터 수원시에 보낸 공문을 보면, 후꾸야마시를 관통하는 아시다강에 서식하는 "스이겐지니타나고"가 서호납줄갱이로 확인되었다며 이 종의 고향을 찾아 합동조사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축만제와 축만제 표석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농사개량을 위해 통감부는 19064월에 통감부권업모범장관제를 발표하였고, 615일에는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이 창설했다. 그 위치는 축만제 제방 아래다. 권업모범장은 1929년에는 농업시험기관으로서의 임무 수행을 위해 농사시험장이라 개칭했다.미군정 때는 중앙농사시험장으로, 1949년에 중앙농업기술원으로, 1957년에 농사원으로, 1962년부터 농촌진흥청으로 바꿨다.

권업모범장 표석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전경

 

朴文會 頌德碑

주사 박문희가 축만제가 홍수로 범람 위기에 처했을 때 뚝을 잘 막아 안전하게 할 수 있었다는 송덕비이다. 파경개축(破坰改築) 구민안도("屯民安堵)"제방이 파괴되자 다시 쌓아 서둔동 사람은 모두 안도하게 했다"로 풀이할 수 있다. 廢壓復完 다음에는 公稅適當은 세금을 공평하게 매겨 무엇을 적합하게 했다는 뜻이다.

주사 박문회 송덕비

농민회관

1971214일 기공식을 갖고 그해 11월 완공했다. 농민회관 건설비용은 전국 농가에서 20원씩 모아서 건설했다. 이곳에서 19733월부터 19833월까지 550회에 걸쳐 77,851명이 새마을 교육을 받았다. 그 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있었다.

농민회관

 

녹색혁명성취탑

통일벼 육성하며 식량 자급자족을 성취하였다는 기념탑이다. 1977년 쌀 생산 4,000만석을 돌파하고 단보당 수확량 494kg에 달하여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하게되었고 그 해 1220일 박정희 대통령은 녹색혁명성취란 휘호를 내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78510일 식량자급 유공 수상자 14명이 뜻을 모아 옛 농촌진흥청 본관 건물에서 북서쪽 50지점에 세웠다.

녹색혁명성취탑

 

농촌진흥청 본관

우리나라 농업의 연구와 지도의 본산이다. UNDP사업으로 1963년 잘 지은 건물이다. 농촌진흥청은 1906년 권업모범장 때부터 2014년까지 108년간 수원시 서둔동 축만제 근처에 있었으나 공공기관 지방 이전 계획에 따라 2014년 전주로 이전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소나무가 있다.

농촌진흥청 수원 서둔동 시대에는 그 산하에 국립농업과학원, 국립식량작물과학원,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국립축산과학원이 있으며, 이 중 농촌진흥청 본청을 포함 국립농업과학원과 국립식량과학원은 서둔동에 위치했었다. 국립농업과학원에서는 토양, 식물생리, 농업기상, 병해충(식물보홈), 농약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고, 국립식량과학원은 벼, 보리, , , 옥수수, 고구마 등 작물의 우량 품종 육성, 재배법 개발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 농업연구기관은 보리고개가 있던 시절 통일벼를 육성하여 우리 국민을 배고품으로 해방시키는데 큰 역활을 하였고, 그 후에도 맛 좋은 우량 품종 육성하고 재배 기술를 확립하여 농업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옛 농촌진흥청 본관

 

우장춘 박사

아버지는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조선인 우범선(禹範善)이며,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ナカ). 아버지는 1903년에 암살되었으며,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6살 때는 고아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으며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실과에 진학하였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한국인이라는 것과 정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다가, 퇴임 직전에 기사(技師)로 승진하면서 퇴임하였다.

우장춘은 195037일 드디어 재일동포 귀환선 38회째로 38() 신흥환(新興丸)에 몸을 싣고 현해탄을 건너게 된다. 우장춘은 고국에 닿기도 전인 38선에서부터 그의 환국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를 실감하였다. 38선에 탔던 귀환동포들은 우장춘 박사를 알아보고는 '이제 우리 농촌도 살게 되었다'며 우 박사의 환국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는 1950년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사망하던 1959년까지 만 95개월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중앙원예기술원장·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였다. 그가 1959811일 사망하자 정부는 부산시문화상에 이어 두번째의 문화포장을 수여하였고, 전국민의 애도 속에 윤일선(尹日善)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유해는 수원시에 소재했던 구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麗妓山)에 안장하였다.

우장춘 박사 묘비

 

수원여기산선사유적지

기도 기념물 제201"수원여기산선사유적지"는 청동기 시대와 원삼국 시대의 마을이 있는 유적이다. 유적은 해발 104m인 여기산 정상부와 여기에서 북서 방향으로 뻗어 내린 능선 상에 위치하는데, 유적의 서쪽 부분이 화강암 채석 공사로 많이 훼손되었다. 청동기 시대 집자리는 3기가 조사되었는데, 긴 네모꼴 형태로 추정되며, 골아가리 구멍무늬토기와 구멍무늬토기가 출토되어 청동기 시대 중기 집자리로 판단된다. 원삼국 시대 집자리는 6기가 조사되었으며, 남쪽에 돌출된 출입 시설이 있는 모양의 반움집이지만, 거주 공간은 육각형 내지 오각형 모습이다.

이 유적은 남한 지역에서 최초로 조사된 원삼국 시대 마을 유적일 뿐만 아니라, 유적에서 발견된 외줄구들과 돌출된 출입 시설이 있는 육각형 집자리는 모두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일 정도의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산 선사유적지와 우장춘박사 묘 조감도

 

백로서식지 여기산

축만제는 물고기를 잡아 먹고 물에 사는 민물가마우지 등 오리의 서식지라면 그 이웃에 있는 여기산은 나무 위에서 서식하는 백로 서식지이다. 백로는 백로과를 통틀어 일컬는 새이다. 백로과의 새에는 왜가리, 중백로, 중대백로, 황로, 쇠백로 등이 있다. 여기산에 서식하는 백로에는 중대백로, 중백로, 쇠백로, 왜가리, 황로, 해오리기 등 6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강창수, 2003).

이곳 백로 서식지는 수원시에서 2008129일부터 "여기산야생동식물보호구역 수원제 2008-333호로 지정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여기산 백로 서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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