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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족 이야기/내 이야기

수원에서 첫날밤, 잊지 못하는 슬래브집 할머니

by 仲林堂 김용헌 2022. 6. 19.

팔달산 강감찬 장군 동상 앞에서 나의 두 아들이다. 강감찬 동상은 지금은 광교저수지 아래 공원으로 이건했다. 강감찬 장군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면 했지만 지금 큰아들은 한의사가 되었고, 작은아들은 회사원이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신혼의 삶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일 년 전만 해도 나도 농진청 연구직 공무원이 될 수 있을까? 나도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던 취직도 하고 결혼도 했다.

 

그러나 바로 신혼살림은 차리지 못했다. 그때는 결혼 후 바로 신혼살림을 차리는 게 아니라 시집 사람이 되라고 얼마 동안 시집살이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시부모 모시는 게 우선이라고 하여 나의 처도 두 달간 시집살이를 했다.

 

취직, 결혼, 시집살이 과정을 통과한 후 신혼살림 자격을 얻었고, 드디어 수원시 화서동 동말에서 19761230일 나의 첫날 밤을 맞았다.

 

결혼 후 달반 간 이별 후 만남이라 기쁨은 컸다. 처 또한 남편과 떨어져 시집살이 과정을 통과하고 부부만의 오븟한 신혼 삶에 기대가 컸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화서동 오거리 근처에 셋방을 얻었다. 수원에서 첫날 부모님은 논산 시골에서 이삿짐 트럭을 타고 오셨다. 수원에서 첫날밤은 우리 부부만의 첫날밤이 아니라 부모와 함께하는 첫날 밤이었다. 부모님은 연탄 500장을 연탄 광에 채워놓고 이틀 밤을 보낸 후 고향으로 가셨다.

 

수원에서 첫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셋방은 새집이지만 외풍이 심해 겨우 내내 이불을 방에 깔아 놓고 지냈다. 당시에는 기름보일러 난방은 거의 없었고 연탄 난방이 보통이었다. 우리 셋방도 연탄을 땠다. 연탄 공기구멍을 다 열어놓으면 불이 잘 피워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연탄 한 장이라도 아끼려고 공기구멍을 늘 막았다.

 

하루는 처가 몸살이 난 것 같다며 메슥거린다고 했다. 몸살이 아니라 알고 보니 연탄가스 중독이 되었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뻔한 사고였다. 그때부터 외풍이 더 했지만 부엌문은 열어놓고 지냈다.

 

강추위에 고생도 많았지만 한편 추위에 대한 추억도 남아 있다. 그해 얼마나 췄던지 서호저수지가 꽁꽁 얼어붙어 3월까지 얼음이 녹지 않았다. 화서동에 사는 동료 직원 중에 스케이트를 타고 서호저수지를 건너기도 했다. 그 당시 수원 시내버스 노선은 원호원에서 서울농대·농진청 노선뿐이라 화서동에서 농촌진흥청까지 출근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나 가끔 철길을 무단 횡단하여 서호저수지 빙판길을 건너기도 했다.

 

그때는 직장예비군이 있었고 예비군은 카빈소총을 보관한 무기고를 지키는 숙직을 했었다. 농진청에서도 2명이 1개 조로 무기고를 지키는 근무를 했다. 어느 날 무기고 숙직을 하던 날 처가 도시락을 가지고 화서동 동말에서 철로를 건너 서호저수지 제방을 따라 무기고 숙직실까지 찾아왔다. 그 때 처는 노랑 털실 옷에 꽃다운 모습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내 인생의 꽃이었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하고 차도 흔치 않았던 때라 시골에서 수도권 오는 게 쉽지 않았다. 셋방은 방이 둘이었지만 하나는 난방도 잘 되지 않는 방이었다. 부모님도 자주 오셔 며칠씩 머물렀고, 장모님께서도 자주 오셨다. 그리고 막내 남동생이 시골 고향 집에 있기보다는 우리 셋방에서 지냈던 날이 더 많을 정도로 자주 와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처는 큰아들을 임신했다. 우리 인생에서 둘도 없는 큰 선물이었다.

 

화서동 오거리 단독주택에서는 셋방은 새집이었으나 매매가 되어 새 주인이 방 하나만 세를 놓는다고 하여 우리는 이사를 해야만 했다. 수원에서 첫 신혼 방은 연탄가스 위험도 있고 북향 방이라서 더욱 춰 이사가라고 하여 내심 좋았다. 우리는 1977년 여름 팔달산 아래 경기인천병무청 옆 셋방으로 이사를 했다. 하동이 고향인 주인댁 아주머니도 친절했다. 거기서 큰아들을 낳았다. 그렇지만 아직 수원은 낯설었다. 우리는 화서동에 정착은 했다고 하나 아직 낯설었다. 

 

당시 수원은 광교저수지물을 상수원으로 이용하였으나 물이 부족해 제한 급수를 하였다. 물통에 졸졸 나오는 물을 밤새 받아 쓰곤했다. 특히 여름철에는 목욕물이 부족했다. 물도 잘 나오지 않았던 시절 매일 기저귀 등 손빨래를 해야 하는 등 고생이 많았다. 그 당시만해도 화서동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 차편이 흔치 않았다. 택시도 화서동은 회차할 때 빈 차로 온다며 승차 거부가 흔했다

 

시장도 그때는 화서동에는 없어 남문시장까지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화서동에 시장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들려 찾아가보니 화서사거리 남쪽 편으로 개울이 흐르는 곳 양쪽에 포장을 치고 채소를 팔고 있어 반가웠다. 점점 시장은 천변을 따라 늘어났다

 

요즘 대부분 가정에 세탁기, 냉장고, 선풍기 등이 가전제품이 없는 집이 없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선풍기도 없었다. 그 다음 해 여름 아버지께서 저의 집에 오셔 선풍기도 없느냐?’ 하시며 돈을 주셨다. 그때 산 선풍기가 '역풍 금성Gold Star 선풍기". 그 선풍기를 37년간 사용했다.

 

그해 숙지산 아래에 화서주공아파트가 세워지면서 화서동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수원에는 아파트가 지금의 화서공원 자리에 공무원아파트가 하나 있고, 화서주공아파트 1단지에 몇 채 있었을 뿐이었다. 1977년 건축한 화서주공2단지아파트는 대부분 13평의 작은 아파트였지만 수원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아파트였다. 그해 겨울 화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매탄주공아파트 분양 공모가 있었다. 그때부터 수원에 아파트 바람이 불었다.

 

화서동 2번째 셋방에도 찾아오는 손님이 그치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아들네 집에서도 숙박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에는 친척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도 찾아와 묵고 가는 일이 흔했다. 한번은 대학동기생 10여 명이 우리 집에서 모임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모임을 집에서 치렀을까?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화서동 팔달산 아래 집에서 2년을 살고 당시는 시골이었던 만석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송죽동으로 이사를 했다. 어디로 이사를 할까 찾던 중 안양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송정초등학교 앞을 지나 노송 가로수가 있는 길을 돌아갈 때 조개정방죽(만석거) 둑에 수십 명이 낚시하는 모습과 만석거 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이 끌렸다. 이사한 집은 마당에 잔디가 있는 주택이었다.

 

이사 오던 1978년 첫째 아들 돌잔치를 했고, 둘째가 다음 해 태어났다. 그때는 백조아파트(지금 동신아파트가 있는 곳)가 세우기 전으로 주택이 많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골목 양쪽으로 8가구가 살았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44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아랫집은 선경합섬 다니는 김천 사람 기성이네 집, 그 아래 집은 슬래브집 할머니 집, 할머니 댁에 세사는 선경합성 다니는 길용이네, 또 그 아랫 집은 수원농고 유 선생님 댁과 유 선생님 댁에 세사는 주찬네가 살았다. 길 건너에는 한일합섭 다니는 문수네. 전매청 다니는 정수네, 해태우유 다니는 숙경이네, 송죽동 터줏대감 이 씨네, 형구네가 살았다. 동네 사람은 서로 왕래하며 생일날 아침에는 이웃을 초대하여 아침 식사를 하곤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수원에 뿌리를 내리며 수원사람이 되어 갔다.

 

송죽동 집에서 큰아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둘째 아들은 중학교까지 이 동네에서 살았다. 우리 큰아들은 어렸을 때 딱지치기를 많이 했다. 하루는 손톱이 땅에 부딪쳐 손톱까지 빠졌었다. 당시에는 놀 거리가 없어 그랬던 것 같다. 좀 크면서 방과 후에는 동네 친구들과 집 앞 공터에서 야구를 거의 매일같이 하며 컸다.

 

시골 맛이 났던 송죽동 마을에서 아이들이 연결고리가 되어 이웃 간에 정이 오고 갔다. 그중에서 특별히 잊지 못할 슬래브집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매일 우리 집에 오셨다. 할머니께서도 손자가 있었으나 이미 장성해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이미 다 커 버린 친손자 대신 어린 우리 두 아들을 새 귀여운 손자와 같이 생각하고 매일 오셨다. 또한, 대전에서 사시는 저의 장모님께서도 우리 집에 오시면 두 분은 친구가 되어 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지냈다. 또 우리 부부를 자식과 같이 살갑게 대해주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 저의 집에 찾았고, 할머니가 임종하실 때 며느리는 저의 처를 불렀고, 나는 직장에 연가를 내고 장지까지 가서 운구하고, 묏자리 땅 밟기까지 했다.

 

할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수원 남문 밖에서 포목점하시며 자수성가했다. 아들도 선생님으로 키우셨고, 두 손자도 반듯한 직장인이었다. 슬래브집 할머니는 이웃 할머니였지만 우리에게는 친할머니와 같았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슬래브집 할머니는 우리 가족의 가슴 속에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에 갈 곳이 많지 않았다. 수원에서 유원지로 원천유원지가 있었고, 연인이 많이 찾는 명소로 하나는 서울농대 뒤편에 있는 푸른지대가 있었고, 파장동에 있는 노송지대가 있었다. 딸기 철이 되면 서울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당시 시내버스는 원호원에서 서울농대 앞을 지나 농진청 입구에서 돌아 수원역을 지나 원호원으로 가는 노선뿐이었다. 딸기 철에는 서울에서 찾는 관광객이 많아 버스는 서울농대 앞에서 후문으로 돌아 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푸른지대에는 지금은 골프 연습장 뒤편에 연못이 있었고 벤치에 앉아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낭만에 젖기도 했다. 노송지대에는 딸기 판매 노점이 여기저기에 있었고, 고급 음식점이 있었고, 삼풍수영장에는 피서철에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우리 아들도 여름 방학 때는 수영강습을 하며 물놀이를 즐겼다.

 

우리는 마당에 잔디가 있는 송죽동 집에서 6년을 살았고, 그 집에부터 4집 건너 이층집으로 이사하여 13년을 살았다. 송죽동 첫 번째 집에서 연탄을 땠고, 두 번째 집에서는 기름보일러를 놓아 기름을 땠다. 당시에는 수원에 아파트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주택에서 살았다. 주택에서 연탄을 때면서 사는 것은 가스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연탄불을 꺼지지 않게 계속 피우는 일도 참 번거로운 일이었다. 연탄을 피우고 난 연탄재를 버리는 일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주택에서 연탄을 때면서 생활하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으며 불편한 줄도 모르고 지냈다. 그 후 화서동에 있는 현재 아파트에서 지금까지 24년을 살고 있다.

 

도시화가 되기 전원 마을과 같았던 송죽동에서 나는 내 인생의 한참 때인 중년기를 보냈고, 우리 두 아들에게는 송죽동이 소년기를 보낸 고향이다.

 

마당에 잔디가 있는 송죽동 집 잔디밭에서 두 아들과 처이다.

 

삼풍농원수영장에서 수영강습에 아들과 함께 참가한 처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 수원에는 수영장이 삼풍농원과 광교저수지수영장이 있었다.

 

큰아들이 소화유치원 다닐 때 융건릉에서 기념촬영 사진이다.
유치원 때 솜씨 자랑 모습이다.
1985년 서호저수지(축만제) 옛 다리 모습이다. 이 다리는 철거하고 그 자리에 1991년 5월 10일 축만교를 세웠다.
1984년 겨울 만석거(조개정방죽)에서 사진이다. 그 해 겨울 조개정방죽에는 천연스케이트장(우측 끝에 일부 보임)이 있었다. 작은아들이 다리를 다쳐 스케이트를 타지 못했지만 형을 따라 스케이트장에 왔었다. 하얀 건물 뒤편 멀리 수일중학교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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