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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족 이야기/내 이야기

내 생애의 봄날 잊지 못하는 슬래브집 할머니

by 仲林堂 김용헌 2022. 8. 3.

슬래브집 할머니와 나의 작은아들이다.

 

아래 글은 수원문화원에서 출판하는 잡지 "수원사랑"에 2022년 8월 3일 투고한 글이다. 지난달 원고를 보냈으나 원고분량이 많다고하여 그 내용을 줄여서 작성했다. 또하나는 작은아들로부터 슬래브집 할머니 사진을 받아 추가했다. 

 

내 생애의 봄날 잊지 못하는 슬래브집 할머니

 

김용헌/유교신문 경기도주재기자, 수원향교 장의

 

꿈에도 그리던 신혼의 삶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일 년 전만 해도 나도 농진청 연구직 공무원이 될 수 있을까? 나도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았으나 운 좋게 바라던 취직도 하고 결혼도 했다.

 

취직, 결혼, 시집살이 과정을 통과한 후 신혼살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나 할까? 드디어 수원시 화서동에서 19761230일 나의 첫날 밤을 맞았다. 나는 결혼 후 한 달 반 이별 후 만남이라 기쁨은 컸다. 처 또한 남편과 떨어져 시집살이 과정을 통과하고 부부만의 오붓한 신혼 삶에 기대가 컸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화서동 오거리 근처에 셋방을 얻었다. 수원에서 첫날 부모님은 논산 시골에서 이삿짐 트럭을 타고 오셨다. 수원에서 첫날밤은 우리 부부만의 첫날밤이 아니라 부모와 함께하는 첫날 밤이었다. 부모님은 연탄 500장을 연탄 광에 채워놓고 이틀 밤을 보낸 후 고향으로 가셨다.

 

수원에서 첫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셋방은 새집이지만 외풍이 심해 겨우 내내 이불을 방에 깔아 놓고 지냈다. 당시에는 기름보일러 난방은 거의 없었고 연탄 난방이 보통이었다. 우리 셋방살이도 연탄으로 시작했다. 연탄 공기구멍을 열어놓으면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연탄 한 장이라도 아끼려고 공기구멍을 마음 놓고 열지 못했다.

 

하루는 처가 몸살이 난 것 같다며 메슥거린다고 했다. 몸살이 아니라 연탄가스 중독사고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뻔한 사고였다.

 

농촌진흥청 무기고 숙직을 하던 어느 날 저녁 도시락을 가지고 화서동 동말에서 철로를 건너 서호저수지 제방을 따라 숙직실까지 찾아왔다. 그 때가 알콩달콩한 꿈같은 시절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우리는 1977년 여름 팔달산 아래 경기인천병무청 옆 셋방으로 이사를 했다. 하동이 고향인 주인댁 아주머니도 친절했다. 거기서 큰아들을 낳았다. 그렇지만 아직 수원은 낯설었다. 우리는 화서동에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뿌리 내리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당시 수원은 광교저수지 물을 상수원으로 이용하였으나 물이 부족해 제한 급수를 하였다. 물통에 졸졸 나오는 물을 밤새 받아 쓰곤 했다. 특히 여름철에는 목욕물이 부족했다. 물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시절 매일 기저귀 빨래를 해야 했다.

 

나는 화서동 팔달산 아래 집에서 2년을 살고 당시는 시골이었던 만석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송죽동으로 이사를 했다. 어디로 이사를 할까 찾던 중 안양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송정초등학교 앞을 지나 노송 가로수가 있는 길을 돌아갈 때 만석거 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이 끌렸다. 이사한 집은 마당에 잔디가 있는 단독 주택이었다.

 

이사 오던 1978년 첫째 아들 돌잔치를 했고, 둘째가 다음 해 태어났다. 그때는 만석거방죽(조개정방죽) 뒤편에는 주택이 많지 않았다. 동네 사람은 서로 왕래하며 생일날 아침에는 이웃을 서로 초대하여 아침 식사를 하곤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수원사람이 되어 갔다.

 

송죽동 집에서 큰아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둘째 아들은 중학교까지 이 동네에서 살았다. 우리 아들은 어렸을 때 딱지치기를 많이 했다. 당시에는 놀 거리가 없었다. 좀 크면서 방과 후에는 동네 친구들과 집 앞 공터에서 야구를 하곤 했다.

 

시골 맛이 났던 송죽동 마을에서 아이들이 연결고리가 되어 이웃 간에 정이 오고 갔다. 그중에서 특별히 잊지 못할 슬래브집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매일 우리 집에 오셨다. 할머니께서도 손자가 있었으나 이미 장성해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이미 다 커 버린 친손자 대신 어린 우리 두 아들을 새로운 손자와 같이 생각하고 매일 오셨다. 또한, 저의 홀로된 장모님께서도 우리 집에 오시면 두 분은 친구가 되어 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지냈다. 또 우리 부부를 자식과 같이 살갑게 대해주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 저의 집에 찾았고, 할머니가 임종하실 때 저의 처는 임종을 지켜보았고, 나는 연가를 내고 장지까지 가서 조문했다.

 

할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수원 남문 밖에서 포목점 하시며 자수성가했다. 슬래브집 할머니는 이웃 할머니였지만 우리에게는 친할머니와 같았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슬래브집 할머니는 우리 가족의 가슴 속에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시골 마을과 같았던 송죽동에서 살 때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웃간에 정이 오고 가는 사람사는 맛이 났던 시절이었다. 그 때가 내 인생의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팔달산 강감찬 장군 동상 앞에서 나의 두 아들이다. 지금 큰아들은 한의사가 되었고, 작은아들은 회사원이 되었다.
1984년 겨울 만석거(조개정방죽)에서 천연스케이트장에서 사진이다. 지금은 수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그 때는 허허벌판이었다.
1985년 서호저수지(축만제) 옛 다리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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