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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킴(지정 미지정)

효심을 전하는 지지대비(遲遲臺碑)

by 仲林堂 김용헌 2022. 4. 29.

 

정면에서 본 지지대비이다.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라거 쓴 하마비이다.
계단에 "遲遲臺" 글씨가 보인다.

 

가첨석이 아주 크다.
비신에 비문이 새겨 있다. 총탄 맞은 흔적이 보인다.

오늘 오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 지지대비(遲遲臺碑)를 찾았다. 이 비는 수원시에서 의왕시로 넘어가는 경수대로변에 있다. 차로 가려면 경기 수원시 장안구 경수대로 1283 지지대쉼터에 주차를 하고 대로의 인도를 따라 걸어서 100여미터 올라가면 수원시와 의왕시 경계에서 하마비와 함께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하마비는 공자를 모신 곳이나 궁궐에 있는데 비석에 하마비가 있음은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이곳에 하마비를 세운 것은 아마 정조 임금이 계신 곳이라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하마비에서 고개를 들고 보면 비각이 보인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오르며 반듯한 비각이 보인다. 사방 1칸의 비각이지만 높은 편이다. 비각 주춧돌이 아주 크다. 비각의 문은 잠겨 있어 틈새로 보니 오석으로 된 비신과 가첨석이 있다.  6.25 동난에 총탄을 맞아 비문이 팽겨나간 곳이 보였다. 단청이 잘 되어 있었다.    

 

지지(遲遲)라는 말은 「맹자」에서 나온다. "공자께서 노나라를 떠나면서 "더디구나! 더디구나! 내 발걸음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부모의 나라를 떠나는 도리라고 것이라고 했다(孟子曰:孔子之去魯,曰:遲遲吾行也 去父母國之道也).

 

정조께서도 현능원(현재 융건릉) 참배하고 돌아갈 때 멀리 현릉원이 있는 화산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아래는 지지대에서 정조가 지은 시이다. 이 시에서더디고 더딘 길이라고 하며 어버이가 계신 곳을 생각하셨다. 

 

晨昏不盡慕   아침저녁으로 모시는 그리움 다하지 못해
此日又華城   오늘 또 다시 화성에 왔네.
霡霂寢園雨   가랑비는 능침을 적시는데  
徘徊齋殿情   내 마음은 재전을 배회하네.
若爲三夜宿   어쩌다가 사흘 밤을 묵어
猶有七分成   그래도 초상화를 한폭은 이루었다오
矯首遲遲路   더디고 더딘 길에서 고개를 드니
梧雲望裏生   바라보는 속에 오운이 피어나네.

 

지지대비는 정조가 1800년 붕어하시고, 7년이 지난 1807년 12월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웠다.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서영보(徐榮輔)가 찬(撰)하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水原府留守兼總理使) 홍명호(洪明浩)가 비의 상단 전자(篆字)를 썼다. 비의 높이 150㎝, 너비 60㎝.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내용 중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 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라는 사실에서 정조의 애틋한 심정이 드러난다.

 

정조는 부왕(父王) 장헌세자(莊憲世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 : 종묘·능침 등에 참배함)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지지대에서 행차를 멈추게 하였는데, 이곳에서 멀리 현륭원이 있는 화산(花山)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휴식을 취한 뒤에도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워 정조의 행차는 항상 이곳을 느릿느릿 움직였고, 이에 따라 이곳을 지지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창살이 사방으로 둘러쳐 있다.
옆에서 본 모습이다.

 

뒷편에서 본 모습이다.

 

주춧돌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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