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만 해도 맑던 날씨가 해 질 무렵부터 눈이 쏟아졌다. 내가 사는 수원에는 몇 년간 눈다운 눈이 없었다. 이렇게 쌓인 눈이라면 설경 사진 한번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대별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 새벽부터 맑을 거라는 예보니, 날씨까지 도와줄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군고구마로 때우고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 아파트 현관을 나오니 눈은 수북하게 쌓였고 바람이 싸늘했다. 수원화성의 장안문과 화서문 촬영을 하려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다 발길을 다시 아파트 정문 쪽으로 돌렸다.
폭설에 기온까지 뚝 떨어졌으니 그늘진 길은 얼어붙으면 빙판이 될 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파트로 진입하는 인도가 몇 년 전 겨우내 빙판길이 된 적이 있었다. 누군가 눈 좀 치웠다면 그렇게는 안 되었을 텐데 그때는 누구도 눈을 치운 사람이 없었다.
경비실로 가서 대나무 빗자루를 챙겨 우리 아파트 진입로로 갔다. 길에는 눈이 10cm 정도는 쌓여 있었으며, 아직 눈을 쓴 흔적은 없었고 이미 여러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만 보였다.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은 쓸어도 눈이 땅에 붙어있어 떨어지지 않고 쓸리지 않는다.
좀 더 일찍 나왔으면 사람들의 눈 발자국이 적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논어에서 ‘낌새를 알아차리면 바로 실천하라’라는 견기이작(見機而作)이라는 말이 있다. 그나마 나라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바로 실천했으니 다행이다.
추운 날씨에 눈을 쓸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내가 오늘 눈을 쓰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면 누구나 본래 타고난 선한 마음이 있어서다. 앞으로 이 길이 빙판이 되면 혹시 넘어져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어서다. 또한, 내가 무슨 이득을 보려는 것도 아니다. 먼저 일이 우선이고 얻는 것은 나중이라는 선사후득(善事後得)의 당연한 실천을 했을 뿐이다.
군자는 위험을 보면 목숨까지도 받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에는 못 미치지만, 위험을 피하지 않고 대응을 했다. 또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물 뿌리고 비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하의 이치를 말하고 헛된 명성을 훔쳐서 세상을 속인다"라고 했다. 나는 남명이 생각하는 천하의 이치까지에는 생각지도 못하지만, 오늘 물을 뿌려 쓸고 청소한 쇄소응애(灑掃應對)도 실천했으니 눈 치우기 하나로 일석삼조(一石三鳥)가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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