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여행/중국(태안, 곡부, 칭따오)

공자와 맹자의 고장 곡부와 추성 성지순례 관광지 해설

by 仲林堂 김용헌 2019. 5. 14.

제남, 곡부, 태산, 추성 관광지 해설

 

 

공묘, 공부, 공림의 평면도이다.

 

 

가운데 그림공묘평면도이다.

 

  

표돌천공원(趵突泉景区)

지난[济南]8경 중 하나인 바오투텅쿵[趵突腾空]은 명청(明淸)시기에 최고로 여겨지던 경관이다. 지난시 도심에 위치해 있으며 지하에 엄청나게 솟아 오는 신비로운 샘이다. 3개의 구멍에서 솟구치는 물이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낸다. 역대 명인들이 찬사가 이어져 왔다. 물이 맑고 투명하며 그 맛 또한 달다. 동서 30m, 남북 20m, 관란정(觀瀾亭)이 촬영포인트이다. 수옥천이 유명하다. 농나라의 대표적 여류 시인 이청조기념관(李淸照記念館)이 있다. 이청조는 젊었을 때는 안정적인 생활을 했으나 나이 들어서는 남편 잃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전란을 겪으면서 애국시를 많이 지었다. 청나라 6대 황제 건륭(乾隆)이 강남(江南)에 올 때 베이징[北京]의 위취안수[玉泉水]를 이곳의 샘물로 바꿔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따밍호공원(大明湖风景区)

지난의 3대 명승지 중 하나로 72개 샘물이 모여 이루어져 생긴 호수이다. 면적은 46만평방미터이다. 이 호수는 언제나 물이 맑고 푸르며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연꽃잎이 무성하며 수상 정자가 있다. 수심이 3m로 장마나 가뭄에도 변치 않는 수위를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숲이 울창하지만 뱀이 없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개구리는 있지만 수온이 낮아 울지 못한다고 한다. 남쪽에 위치한 천불산의 반영이 비출 때 모습은 지난시를 대표하는 이미지이다. 호수 가에 따라 정자, 누각, 수상정자, 화랑이 있다. 섬이 6개가 있고, 7개의 다리가 있다. 쑤저우의 창랑정(창랑정)을 본 떠 만든  소창랑정(小滄浪亭)이 볼만하다. 역하정에는 두보가 서예가 이옹을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는 싯귀가 있다. 海右此亭古 濟南名士多

 

천불산(天佛山)

높이는 285m이며, 제남에서는 대명호, 표돌천과 함께 3대 명승지로 꼽힌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제남시 전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천불산 본래 이름은 소재지인 력하구와 같이 력하산 또는 력산(历山)이었으나 이 산에 천불사가 있어서 최근 이름을 천불산으로 변경했다. 천불사는 불교가 흥성했던 수나라 때 수 문제는 제남 력성 출신인 어머니를 위해 불상을 많이 만들었는데 당나라 때 천불사가 건립됐다. 전국 142중점 사원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 13여개 불상이 남았다. 석불상을 자세히 보면 얼굴과 몸통의 색깔이 다른데 이는 문화혁명 때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공묘(孔庙)

노나라 애공(哀公)은 공자의 사후 2년이 되던 해에 공자의 집을 묘()로 삼았다. 기원 전 205년 전한을 세운 한고조 유방(劉邦)은 노나라 공묘에서 제물을 올리고 제례를 지냈다. 그는 후의 황제나 고관들에게도 전례를 따르도록 하였다. 황제는 즉위 뒤나 전승 등 중요한 때 이곳을 방문했다. 그 후 12명의 황제가 공자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직접 방문하였으며, 그 외 100명 이상의 황제가 제례를 위해 대리인을 파견한 것이 196회 이상이다.

 

, , , 원을 지나며 규모가 커졌고, 명청조에 기본 모양이 만들어졌다. 원래 공자의 집은 수나라 611(대업 7) 묘소를 재건할 때 철거되었다. 송나라 때인 1012, 1094(소성 원년)3개의 전각과 4개의 정원을 재건하고, 그 주위에 총 400개가 넘는 방을 지어 많은 궁전을 건축했다. 금나라 말기인 1214(정우 2)에는 화재와 약탈로 공묘는 파괴되었다. 그 후 원나라 초기인 1302(대덕 6)에 재건했고, 1331(지순 2)에는 궁전과 같이 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1499(홍치 12)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그 후 현재의 규모로 재건되었고, 그 후 건물이나 비석과 장식 등이 추가되어 현재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남북을 중심축으로 배치했고, 부속건물은 좌우대칭으로 배치했다. 면적은 140,000이고, 남북 길이는 1,120m이다. 5殿, 1(팔작집), 1, 2(행랑), 2(남향 대청이 있는 집), 兩齋宿(재개할 때 묵는 집), 17碑亭(비석 정자), 54座門, 466이다.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 맹자<만장하>에 나오는 구절 중에 들어 있다. 금성옥진이란 공자가 고대 성인(聖人)들의 장점을 집대성(集大成)하여 모두 지니고 있는 성인이라는 점을 찬미하는 말이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은 성인의 찬미를 음악의 연주에 비유하고 있다. 금성(金聲)이라는 종()을 쳐서 시작을 알리고, 끝나려고 할 때 옥경(玉磬)이라는 악기를 쳐서 끝남을 알린다. 시작은 의 일이고, 끝맺음은 의 일이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 해석은 1993년에 출토된 곽점초간(郭店楚簡) 중에 오행(五行)이라는 책에서 보면 다른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맹자보다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자사(子思)가 지었다. 이 책에 금성(金聲)이고 옥음(玉音)이다. 은 인도(人道)이고 은 천도(天道)이다. 오로지 유덕(有德)한 사람만이 (외적으로) 금성(金聲)을 실현한 다음에 (마음에서) 옥진(玉振)을 울리게 한다.라고 다르게 해석했다.

 

영성문(欞星門, Lingxing Gate): 가장 남쪽의 문이다. 영성은 옛날 전설에 천상에 있는 별(), 고대 제왕이 제사 지낼 때는 이 별에 제례를 올렸다. 공자의 위대함이 이 별과 같다고 표현 한 것이다.

 

태화원기방(太和元氣坊): 공자의 학문과 사상이 우주 천체와 같이 순환하여 영구 존재한다는 뜻이다. 건융제의 친필이다.

 

성시문(聖時門): 명나라 때 공묘의 두 번째 대문으로 처음 만들었고 1730년 청나라 강희제의 네 째 아들이며 청나라 3대 황제인 옹정제가 이름을 지었다. 성시(聖時)맹자孔子聖之時者에서 따온 말로 공자는 시대를 초월한 성인이란 뜻이다.

 

홍도문(弘道門): 1377년 명나라 홍무10년 세웠으며, 명나라 이전부터 원래 공묘의 출입문이었다. 청나라 옹정제가 논어의 아래 구절을 인용하여 현판을 하사했다. 人能弘道 非道弘人(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게 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문(大中門): 청나라 건융제가 직접 쓴 4번째 출입문이다. 원래는 中和門이었다. 이 문을 지나면 공묘의 4번째 정원이 나온다. 건융제 친필이다.

 

동문문(同文門): 원래는 參同門이었고, 그 후 중용 書同文 行同倫 今天下 車同軌에서 따와 지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의 문화와 문명을 하나로 통일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현판은 청나라 건융제가 직접 썼다.

 

규문각(奎文閣): 고대 천문학은 하늘의 별자리를 28개 무리로 나누고, 그 중 문관의 우두머리아자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 이름을 규()라고 했다. 공자를 문장을 주관하는 별로 본 것이다. 문장과 서적을 뜻하고 많은 서적을 보관하는 건물이라고 하여 규문각이라고 했다. 1018(천희 2)에 축조되어 1504(홍치 17)1985년에 대규모 개수된 건물이다. 원래 이름은 藏書樓. 이름은 奎主文章에서 따왔다. 역대의 황제로부터 하사된 경서 등을 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단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규문각 앞에는 용봉(龍鳳)이라는 나무가 있다. 건융제가 제사지내고 이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나무에 황제의 무늬가 생겼다는 소문이 있다.

 

13비정(十三碑亭): 역대 황제가 이곳에 참배할 때 세운 비각으로 13개의 비각이 있다. 대에 2, 대에 2, 대에 9개를 세웠다. 특히 뒷줄 5개 비정 중, 청나라 황제들이 남긴 4개가 걸작으로 꼽힌다. 이 중 유명한 것은 청나라 강희제가 600km떨어진 북경 서산에서 가져 온 65톤의 비석이다. 운하를 이용하고, 겨울에 물을 뿌려 얼린 뒤에 끌고 왔다고 한다.

 

대성문(大成門): 대성전의 정문이다. 이름은 맹자에서 孔子之謂集大成에서 따왔다. 문은 43문이다. 청나라 옹정제가 직접 썼다. 가운데 문이 大成門이고, 대성문의 우측문이 金聲門이고, 좌측문이 玉振門이다.

 

행단(杏壇): 대성문 안 정원 중간에 있는 사각형의 겹처마 정자이다. 주위에 살구나무를 심어 놓아 행단이라 불렀다. 공자가 학문을 가르치던 장소로 장자(莊子), 어부(渔父)편에 등장한다. ‘공자가 치유의 숲을 거닐다가 행단에 앉아 쉴 때, 제자들은 책을 읽고 공자는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문장 속 행단이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원래는 대성전이 있던 자리였다. 1018년 공자의 45대 손이 공묘를 수리하면서 대성전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행단을 만들어 살구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행단 양 옆에 몇 그루의 작은 살구나무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모든 공묘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로 54m, 세로 34m, 높이는 32m에 이른다. 28개의 장식된 기둥으로 받쳐져 있고, 각각 6m의 높이와 0.8m의 직경이다. 궁전 정면의 10개의 기둥은 휘몰아 감기는 용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기둥은 황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황제에 질투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덮개를 걸 수 있었다고 한다. 실내 중앙에는 3.4m의 거대한 공자 조각상이 앉아 있다. 매년 공자를 기리는 제사 의식이 이곳에서 거행된다.

 

대성전 안에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가 쓴 生民未有(백성이 생긴 이래 아직 공자 같은 사람은 없다),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가 쓴 萬歲師表(오래도록 스승이자 표상이다),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가 쓴 斯文在茲(모든 문화와 문명이 공자 안에 있다) 현판이 있다.

 

성적전(聖蹟殿): 공자의 발자취를 비석에 새긴 그림인 성적도(聖蹟圖)’를 보존하기 위해서 세운 건물이다. 공자의 아내를 위해 지은 침전寝殿 뒤에 있다. 출생에서부터 사후에 제자가 무덤에 안치하는 과정까지 공자의 일생을 보여주는데, 38cm, 길이 60cm의 석벽 112폭이 사용됐다. 한 인물의 일생을 연속적인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으로는 중국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역사와 예술적 가치가 높다는데, 그림에 유리벽을 씌워놓은 데다 대부분 마모되어서 육안으로 감상하긴 어렵다.

 

공부(孔府)

취푸시의 도심에 위치하여 있으며, 공묘에 이웃해 있다. 공자의 자손들이 거주하는 저택이다. 예전에는 연경공부(衍聖公府)라고 했고, 지금은 공부(孔府)라고 부르고 있다. 실내 가구와 진열품은 복원한 것이다. 관청과 저택이 합친 고궁에 버금가는 귀족 저택이다. 공부(孔庙)가 보관하고 있는 문화제가 많은데, 그 중 제일 유명한 것은 상주십기(商周十器)”이다. 원래는 궁전에서 보관 사용된 청동으로 만든 관혼상제 등 연회에서 사용된 기물로써, 건륭(乾隆)황제가 하사한 물품이다.

사당, 누각, 대청 등이 총 463칸이다.

 

(1) 中路

孔府大門

다음의 편액이 주련에 있다.

與國咸休安富尊榮公府第 (국가와 편안함과 부귀 존영을 함께 한 관저)

同天并老文章道德圣人家(하늘 같이 뛰어난 문장가이자 도덕 성인의 집)

重光門: 恩賜重光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六廳: 6(에 해당하는 관천으로 80여명이 소속되었다. 그 중 3품이 2, 4품이 4명이었다.

大堂: 관료로 연성공이 집무를 보거나 의식을 거행하던 곳으로 의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二堂: 일상적인 업무를 보던 곳이다.

三堂: 가족관련 업무를 보던 곳이다.

奎樓: 가장 비밀스런 곳이자 귀중품을 은밀히 보관하는 금고 역할도 했는데 명대 건축된 것으로 공부에서 가장 높은 4층 건물이며 그 안에 3m 깊이의 우물이 있다.

內宅門: 계탐도(戒贪图)가 그려져 있다. 계탐도는 '()'이라는 상상의 동물을 그려놓은 그림이다. '()'은 무엇이든지 먹어치우는 탐욕의 상징이 되는 동물로 욕심을 경계하는 의미로 그려놓은 그림이다.

前上房: 결혼식이나 생일잔치 등 여자들의 참가하는 중요한 행사가 러지는 곳이다.

(2) 東路

東學, 一貫堂, 家廟 등이 있다.

(3) 西路

賫奏廳, 西學, 忠恕堂, 花廳, 學屋, 花園 등이 있다.

 

공림(孔林)

취푸시 북문 밖에 있으며 성림(聖林)이라고도 불린다. 공자와 그 후손들의 전용 묘지이다. 공자 직계 후손의 묘가 10만여 기가 있다. 숲 속에는 수많은 묘비가 있고, 소나무가 울창하고 10만여 고목이 있다. 4,000기 이상의 비석이 있고, 3,000기 이상의 무덤이 있다. 공림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되고, 보존 상태가 훌륭한 가족 묘지이다.

공림(孔林)의 시작은 공자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이며, 공자를 뒤이어 이 곳에 장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계속해서 늘어남으로써 공림(孔林)의 면적도 점차 늘어났다. 총면적 약 183.33헥타르이고 둘레는 5.6이며, 담장의 높이는 3m, 두께 1m이다. 곽말약(郭沫若)이 말하기를 공림(孔林)은 매우 훌륭한 자연 박물관이자 공씨(孔氏) 가족의 역사를 기록한 그림이다라고 하였다.

공림(孔林)은 중국역사 정치, 경제, 문화발전 및 장례양식의 변천사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역사적 사료이다.

 

공자묘(孔子墓): 공림의 중심에 있고, 묘의 폭은 30m, 높이는 5m이고, 묘 앞에는 명나라 때 1443년 세운 대성지성문선왕비(大成至聖文宣王碑)”와 원나라 때 1244년에 세운 선경비(宣聖墓)가 있다. 공자묘 좌측에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묘가 있고, 우측에 공자의 손자인 공급(孔伋: 子思)묘가 있다. 공급의 묘 앞에는 기국술성공묘(沂國述聖公墓)”라는 비석이 있다.

공자는 아들 이와 수제자 안연이 죽고, 자로가 피살된 기원전 480년 병석에 누었다.

 

周公廟(주공 사당)

주공묘(周公廟)는 곡부시에서 동북쪽으로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주공은 산시(陝西)성 치산(岐山) 사람으로 성은 희()이고, 이름은 단()이다. 숙단(叔旦)이라고도 한다. 주 문왕 희창(姬昌)의 넷째 아들이고, 무왕 희발(姬發)의 이복동생이다. 강태공, 소공 석()과 함께 주나라를 창건한 공신이다. 주나라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주공(周公), 혹은 주공단(周公旦)으로 일컬어진다. 주 문공(文公)으로도 불리며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 봉해져 제후국 노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무왕을 도와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를 멸망시키고, 동이(東夷)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무왕이 죽은 뒤에는 어린 조카 성왕(희송)을 도와 주 왕조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주공은 무왕을 보좌하여 두 차례나 동쪽으로 은()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러 갔으며, 예락(禮樂)을 제정하여 천하를 크게 다스렸다. 그 공을 인정받아 그는 곡부(曲阜)에 봉해지고 "노공(魯公)"이라 일컬어졌다. 후세 제왕은 주공을 원성(元圣)”이라 칭했으며 이로부터 주공묘는 원성묘(元圣庙)라고도 불렀다.

주공묘는 총 면적은 75무에 달하며 주변은 붉은색 벽에 에워 싸여있으며 안은 4동의 정원으로 이루어졌다. (殿), (), (), (), (), () 57칸이 있고 고대 비석이 30여동이 있다.

주공묘의 대문은 공자묘(孔庙)와 비슷하며 영성문(棂星门)”이라고 부른다. 대문 안의 첫 번째 정원에 들어서면 정중앙에 남북 복도가 있으며 두 번째 정원과 통한다. 정원내의 동,서 벽에는 석방이 부착되어 있으며 동쪽 석방에는 경천위지(经天纬地)”, 서쪽 석방에는 제례작락(制礼作乐)”이 새겨져 있다. (동몽선습: 周公制禮作樂하시니 典章法度粲然極備하더니...)

 

顔廟(안자 사당)

안묘(颜庙)는 처음에는 곡부(曲阜) 성 동북쪽 3킬로미터 기리의 오천장(五泉庄) 부근에 소재했다. () 초기에 재건을 시작해 10년 뒤에 완공했고, 대덕(大德) 말기에 옛날 묘를 헐었다. 연우4(延祐四年) 1317, 누항(陋巷) 옛터로 이장했다. 산동성(山东省) 곡부(曲阜) 성 북문 안에 있고, 누항가(陋巷街) 북쪽 끝자락이 공부(孔府) 뒤쪽 화원(后花园) 맞은편이다. () 만력22(万历二十二年), 1594년에 재건해 지금까지 700년 가까운 역사를 갖게 되었다.

 

니산(尼山)

니산은 원래 니구산(尼丘山)이었으나 공자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려 니산으로 부르고 있다. 공자 어머니가 니산에서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다. 이곳 부자동(夫子洞)에서 공자가 탄생했다. 곡부시의 남동쪽 30 킬로미터에 위치하며 높이는 해발 340m이다. 이곳에는 공자사당(孔子廟), 니산서원(尼山書院)이 있으며, 이곳에는 오노봉(五老峰)노원림(鲁源林)지원계(智源溪)곤영동(坤灵洞)관천정(观川亭)중화학(中和壑)문덕림(文德林)백운동(白云洞) 등 소위 니산8경이 있다.

 

다이묘(岱廟)

대산(岱山)은 태산(泰山)의 다른 이름이다. 태산 남쪽 기슭에 있으며 진한시대 초기에 세웠고, 고대 제왕이 태산신에게 제사를 올린 사당이다. 또한 유명한 도교(道敎)의 성지이다. 다이묘의 건축규모는 북경의 고궁, 산동 곡부의 삼공, 승덕피서산장과 함께 중국 4대 고건축으로 알려졌다.

 

맹묘(孟庙)

맹묘(孟庙)는 지닝시(济宁市, 제녕시) 현급 쩌우청시(邹城市, 추성시) 성 동북 13거리의 쓰지산(四基山) 서남 기슭 맹가능묘(孟轲陵墓) 앞 맹자를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아성묘(亚圣庙)라고도 불리며 송나라 경우(景佑) 4(1037)년 건립되었다. 맹림향전(孟林享殿) 내에 있는 송나라 경우(景佑) 5년에 만들어진 신건맹자묘기(新建孟子庙记)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이 사당은 공제의 제45세손 공도보(孔道辅)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후 이 사당이 성으로부터 멀리 있어 제사 등 제반 활동이 불편하자 또 다른 맹묘를 쩌우청(邹城, 추성) 동쪽 교외에 건립한 것이 쩌우청(邹城, 추성) 사당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당의 구체적인 위치, 규모와 건립연대 등에 대해서는 지금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송 선화(宣和) 3(1121) 현재의 위치에 맹묘(孟庙)를 다시 건립하였으나 현재의 사당 또한 선화(宣和) 연간에 건립한 옛 모습이 아니다. , , , 청에 이르기까지 십 수차의 중수와 확대를 통해 비로소 현재의 규모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금의 맹묘는 쩌우청(邹城, 추성)의 청구(城区, 성구) 남부에 위치하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No.3-83)로 지정되어 있고 사당 내에는 고목이 울창하고 비석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으며 주위가 붉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맹묘(孟庙)의 면적은 1964년 측량에 따르면 남북으로 458.5m, 동서로 95m로 총면적은 65.3()로 공묘(孔庙)에 다음가는 규모로 산둥성(山东省)에서 현존 역사가 오래되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고건축군의 하나이며 송원 대에서 명청 시기에 이르는 고건축의 대표작품이다. 맹묘 내에는 진(), (), (), (), (), (), (), ()의 역대 비석 280개가 있으며 이 중 주요한 내용으로 역대 황제의 성지(圣旨), 맹씨가족보계(孟氏家族谱系), 역대 확장 기록, 문인묵객의 시와 글씨, 맹묘송(孟庙颂) 등으로 매우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맹부(孟府)

중국 산둥성[山東省] 쩌우청[邹城]에 위치한 맹자의 직계자손이 거주하는 저택이다. '아성부(亚圣府)' 라고도 부른다. 맹묘와 길 하나를 두고 나란히 있다. 전형적인 전통양식을 따른 건축물로서 평면은 장방형이고 대지 점유면적은 약 22,400이다. 앞뒤로 7개의 원락(院落)148칸의 방이 있다. 중심 건물인 대당(大堂)은 관원을 접견하거나 공적 업무를 보던 곳이다. 대당의 양쪽에 있는 행랑은 맹부의 살림살이를 관리하던 관리원이 살던 곳이다. 대당 뒤에 쓰허위안[四合院]으로 지어진 주택이 있는데, 맹자가 생활하던 곳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