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이 1298년(충렬왕 24)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1308년(충선왕 즉위)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에 국자감으로 바뀌었고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고쳤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또한 태학(太學)·반궁(泮宮)·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태조대에 새 도읍인 한양을 건설하면서 1398년(태조 7)에 숭교방(崇敎坊 : 지금의 서울 명륜동)에 성균관의 건물을 세웠다.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봄·가을로 석전(釋奠)을 행하는 문묘(文廟), 강의 장소인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서재(東西齋)가 이때 세워졌고, 그후 성종대에 도서를 보관하는 존경각(尊經閣)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선조대와 그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 말기에 갑오개혁을 통해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성균관의 성격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성균관에 경학과(經學科)가 신설되고 역사·지리·세계사·세계지리·수학 등을 교육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병에 의해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게 되었다. 성균관을 폐지한 일제는 민족교육이 아닌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국립대학을 국립대학으로 설치하였다. 성균관은 국립대학으로서의 면모를 잃고 경전을 교육하는 사설학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전국 유림을 중심으로 성균관을 재건하고 유교를 부흥시키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성균관이 지니고 있었던 교육기능을 되살리기 위하여 1946년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다. 교육기능은 성균관대학교에서 맡고 성균관은 제례 기능을 주로 맡고 있고 국가기관이 아닌 민간 재단으로 국가의 예산 지원이 없어 운영에 어려움이 큰 가운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균관의 건물은 크게 강학을 담당하는 명륜당이 있고, 제례를 담당하는 대성전이 명륜당 앞에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좌우로 있고, 그 뒤에 존경각과 육일각이 있다. 명륜당에서 동북방향으로 정록청이 있다. 정록청 뒤에 향관청이 있다. 향관청의 좌우로 동월랑과 서월랑이 있다. 동월랑의 동쪽에 서리청이 있다. 진사식당은 동재의 동쪽에 있다.
공부자의 사당인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서재의 서쪽에 전사청, 수복청이 있고, 제기고가 서무의 서쪽에 있다.
그 외 동무의 남쪽이며 성균관 정문에 탕평비각이 있다. 그리고 서북 방향이며 성균관대학교 진입하는 곳에 비천당이 있다.
강학을 담당하는 명륜당이다.
유교 경전 등 서적을 보관 했던 존경각(尊經閣)이다. 지금의 도서관 역활을 했다.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던 궁시(弓矢)·웅후(熊侯)·미후(麋侯) 등을 보관하는 육일각(六一閣)이다. 선비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으로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육예(六藝)라 한다.
성균관의 참하관(參下官)이 입직하여 중요한 시정(時政)을 기록하던 정록청((正錄廳)이다.
문묘(文廟) 향사(享祀) 때 헌관(獻官) 및 제집사(諸執事)들이 거처하며 심신을 청재(淸齋)하는 향관청(享官廳)이다.
향관청의 서쪽에 있는 서월랑이다.
향관청의 동쪽에 있는 동월랑이다.
진사식당이다. ㄷ자로 된 건물로 사진은 이 건물의 서쪽 부분이다.
진사식당의 동쪽 부분이다.
동쪽에서 본 동재이다.
동쪽에서 본 동재의 툇마루이다.
명륜당 안쪽에서 본 동재이다.
명륜당의 서쪽에 있는 서재이다.
대성전 앞에 있는 묘정비각이다.
동무이다.
수복청이다.
제기고이다.
전사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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