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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십만양병설이 허위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by 仲林堂 김용헌 2018. 4. 3.


십만양병설이 허위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김용헌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16, 선조 1591일 병진 1번째에 아래는 같이 십만병(十萬兵)을 양성하자는 기록이 있다.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자, 유성룡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매우 강력히 변론하였다. 이이는 늘 탄식하기를 유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참으로 특출하지만 우리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반드시 그의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국사를 담당하여 군무(軍務)를 요리하게 되었는데, 그는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고 충근(忠勤)한 절의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 珥嘗於經席獻言: "請預養十萬兵, 以備前頭不虞之變" 成龍曰: "養兵所以養禍也" 論辨甚力珥每歎: "柳成龍才氣儘高, 而不欲與吾同事, 吾輩死後, 方必施其才" 及壬辰之亂, 成龍當國, 料理軍務, 每稱珥有先見之明忠勤之節, 使其不死, 必有補於今日云

 

박약회보에 유현우(柳賢祐)씨가 기고한 글에서 십만양병설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는 그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그는 십만양병설은 율곡전서, 선조실록, 서애집에는 없으나 오직 사계 김장생의 제자들이 쓴 글에만 나온다며 이것은 율곡을 성인화하고 서해를 폄훼하려는 서인의 주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율곡전서에 십만양병 글이 있다. 율곡전서에 율곡행장, 율곡시장, 율곡연보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속에 십만양병설이 포함되어 있다.율곡전서에 십만양병설이 없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그는 선조실록에는 없고, 선조수정실록에만 있어서 허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선조수정실록은 서인이 만들어 진실이 아니고, 북인이 만든 선조실록만이 진실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선조실록은 동인에서 분파된 강경파인 북인이 만든 실록으로 대학자 이이의 죽음을 단 3글자 李珥卒뿐이니 얼마나 편파적인가 짐작이 간다.선조실록은 또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이 일본에 파견되어 돌아와 올렸던 보고서도 빠져있어 극심한 당파성을 보여준다. 잘 못된 선조실록을 바로 잡은 것이선조수정실록이라고 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도 1969조선왕조실록 범례에서 이를 지적 하였다. 십만양병설이선조실록에 없고,선조수정실록에 있다고 하여 조작이라는 주장은 잘 못된 것이다. 그리고 이이의 십만양병을 반대한 서애의 문집인 서애집에 십만양병설이 없음은 당연한 것을 가지고, 조작이라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그는 사계와 그 제자들이 쓴 글에만 십만양병설이 나오기 때문에 율곡을 성인화하고 서해를 폄훼하려는 주장이라고 했다. 십만 양병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십만양병설은 율곡의 제자들의 글에만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십만양병설은 유몽인(柳夢寅)의 글에도 있다. 그는 광해군 때 이조 참판을 지냈고 가선대부, 영양군의 칭호를 받았으나 인조반정 후 모두 삭탈 되었다. 유성룡은 유몽인을 우리나라 100년 이래 없었던 빼어난 문장.”이라고 극찬 하였는데 유몽인이 허위로 썼다고 볼 수 없다.

 

이렇게 어떤 사실을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자의로 누구를 성인화하고 폄훼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그는 율곡행장이나 율곡의 신도비에 있는 사실을 어떤 증거도 없이 단지 추정만하여 믿을 수 없다며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계 김장생은 문묘에 배향된 분으로 사무사(思無邪)의 정신으로 하나의 거짓도 없이 한 평생을 사신 분으로 알려졌다. 그는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겠다했다고 한다. 털 하나도 틀림없이 그대로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계가 어떻게 대학자인 스승 이이의 행장을 거짓으로 쓸 수는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이는 평소에도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구체적인 대책까지 제시했다. 김장생은 스승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고, 이것이 행장에 수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선조수정실록에는 십만양병설이 15929월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암 송시열 쓴 율곡연보에는 15834월이라고 하여 시기가 서로 맞지 않다면서 역사에서 시기가 중요한데 시기를 무슨 조작이라고 한 듯이 꿰맞추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허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시기가 다르다고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논리적이 아니라고 본다. 두 시기 중 하나가 틀릴 수도 있고 둘이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는 또 율곡에 문성이란 시호가 내린 것은 1624년인데 어떻게 율곡행장에 문성이란 시호가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유성룡이 율곡을 겨냥하여 한 말은 이문성은 정말 성인이다.”(李文成眞聖人也)가 아니고 이문정은 정말 성인이다.(李文靖 眞聖人也)”라고 한 것이다. 문정(文靖)과 문성(文成)을 혼돈하고 조작이라고 주장하는지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는 1582병조판서인 율곡의 주장을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인 서애가 감히 저지를 할 수 있느냐고 했다. 이 또한 맞지 않다. 서애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왕과 백관을 규찰(規察)하고 대간(臺諫)할 수 있는 자리로 조선왕조에서는 정승의 의견에 부제학이 충분히 반대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그는 사계가 그리는 경연장에서이라고 했다. 사계는 영의정까지 증직 받았지만 벼슬은 호조정랑, 정산현감, 안성군수 등으로 낮아 경연에 참석할 위치가 아니었다. 사계가 그리는 경연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다. 그는 끝으로 서애가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사계를 치졸하고 억지스런 계산으로 의심 된다고 자의적으로 폄하하고 있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의심만으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유현을 감히 치졸하다고 할 수 있나? 비판한다.

 

그는 결론에서 율곡의 충심과는 무관하게 못난 제자들이 물을 흐려 놓았다. 스승을 존경하는 사계의 재주가 엉뚱한 모사에 쓰여 십만양병설이라는 허구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어떤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다른 사람을 폄하하고 있다.


 각주: 이문정(李文靖)은 중국 송나라 때 재상 이항(李沆)의 시호로 앞날을 잘 예측한 사람. 여기서는 유성룡이 율곡을 이문정(이항)에 비유하여 한 말이다.


위 글은 김용달 일가의 이름을 박약회보지에 기고하라고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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