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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율곡십만양병설에 관한 진실"을 유교신문에 기고하고 나서...

by 仲林堂 김용헌 2018. 4. 3.

오늘 새벽 5시에 김언수 일가로부터 받은 메일을 보고 수정할 사항을 살펴 본 후 유교신문사에게 사진과 함께 "율곡십만양병설에 대한 진실"이란 원고와 함께 사진을 보냈다. 오늘 오후 향교에서 한시반 수업을 받은 후 인테넷 유교신문을 확인 해보니, '특별기고'로 올라 와 있었다. 이번 기사 원고는 김언수 일가가 작성했지만 내가 많이 다듬었다. 김언수 일가의 이름으로 기고했지만 내 이름으로 기고한 것과 같이 기뻤다. 사계 선생을 정당한 근거 없이 폄훼하는 사람들에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 기사를 작성은 대구에 사는 김용달 일가로부터 "박약회보"에 사계 선생을 아주 심하게 폄훼하는 기사가 있다면서 광산김씨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면서 유교신문에 반론을 기고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래서 박약회보를 카톡으로 사진 찍어서 보낼 수 있냐고 하여, 그 기사를 보았다. 류현우씨가 박약회보에 기고한 "십만양병설 비판"이란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 류현우씨는 자의적으로 근거 없이 사계선생을 심하게 비하하는 글이었다. 용달 일가로부터 반론 기사 원고를 받아 보고, 나는 조목 조목 반박하는 글을 작다시 작성했다. 다시 작성한 글은 용달 일가가 소개해주신 김언수 일가에게 연락을 받고 전화 통화를 하고 언수 일가에게 보냈다. 그 글은 "박약회보"에 투고 해보라고 했다.


한편 유교신문에는 류현우씨가 쓴 글을 반박하는 글을 올릴 수는 없고, 십만양병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작성해야 했다. 김언수 일가께서 기사 원고를 보내 왔다. 그의 원고는 칼럼으로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그 원고를 검토하고 수정 보완하고 율곡전서에 있는 영조 때 율곡전서에 나오는 이문정(李文靖)과 순조 때 율곡전서에 나오는 이문성(李文成) 원전 사진을 요청하여 받았다. 


다음은 이번 유교신문에 기고한 원고이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대한 진실

 

김언수 / 서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수년 전 율곡 이이는 경연에서 십만 군사를 양성하여 위급에 대비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토붕(土崩)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선조에게 건의하였다. 그때 서애 유성룡이 말하기를 사변이 없는데 군병을 기르는 것은 화근을 기르는 것이다라고 반대하였다.

 

임란이 일어난 후 유성룡이 조정에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에 와서 보니 이문정(李文靖)은 정말 성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이 율곡전서속 율곡행장, 율곡시장, 율곡신도비, 율곡연보에 있고, 선조수정실록에도 표현은 다르지만 있다.

 

율곡 이이 십만양병설(이하 양병설’)은 율곡이 직접 쓴 글에는 보이지 않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효종임금은 양병설을 직접 언급했고(효종실록 효종7126), 좌의정, 병조판서, 훈련대장 등도 언급했으며 일반 대중들도 수백 년 동안 이 사실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근래 몇몇 사람들이 이를 부정하거나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양병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양병설이 선조실록에는 없고 인조반정 후 서인들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에만 기록되어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실록은 북인들이 편찬하여 자기 당파 사람들은 한없이 치켜세우고 반대편 사람들은 날조하여 모함까지 하고 있다. 또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이 일본에 파견되어 돌아와 선조에게 올렸던 보고내용도 빠져 있어 극심한 당파성을 보여준다. 국사편찬위원회도 1969조선왕조실록 범례에서 이를 지적하였다.

 

양병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양병설이 율곡의 제자들의 글에만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양병설은 유몽인(柳夢寅)의 글에도 있다. 유몽인은 한때 율곡의 정파 사람인 성혼의 제자이었으나 사람됨이 부박(浮薄)하다고 쫓겨나 서인의 반대 세력인 동인에서 분파된 대북 사람들과 교류하여 중북이라 불렸고 율곡의 제자가 아니다. 그는 광해군 때 이조참판을 지냈고 가선대부, 영양군의 칭호를 받았으나 인조반정 후 모두 삭탈되었다.

 

유성룡은 유몽인을 우리나라 100년 이래 없었던 빼어난 문장이라고 극찬 하였는데 유몽인이 유성룡에 대하여 허위의 글을 써서 발표하였다고 볼 수 없다. 유성룡과 유몽인이 서로 대척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또 임진왜란이 발발(1592)하자 유성룡은 그의 사후 17년 후(1624)에 율곡이 받은 시호(諡號) 문성(文成)을 어떻게 미리 알고 이문성은 정말 성인이다(李文成眞聖人也)”라고 하였겠느냐? 따라서 양병설은 서인들이 만들어 낸 결정적, 충분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율곡을 겨냥하여 한 말은 이문성은 정말 성인이다(李文成眞聖人也)”가 아니고 이문정*은 정말 성인이다(李文靖 眞聖人也)”라고 한 것이다. 영조 20(1744), 영조 25(1749) 처음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이문정은 정말 성인이다라고 되어 있으나 순조 14(1814) 재발간한 것에는 정()이 성()으로 바뀐다. 양병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재발간 율곡전서만을 보고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처음 발간된 율곡전서는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병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사료 조사 없이 사리에 닿지 않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십만양병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근거 없이 자의적 판단으로 양병설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이문정(李文靖)은 중국 송나라 때 재상 이항(李沆)의 시호로 앞날을 잘 예측한 사람. 여기서는 유성룡이 율곡을 이문정(이항)에 비유하여 한 말이다.  

 

사진설명: 순조14(1814) 간행 율곡전서 중 율곡행장 ()에서는 李文成이나 영조20(1744) 간행 율곡전서 중 율곡행장()에서는 李文靖이다.



영조 20년 1744년 발간한 율곡전서 부록3에는 李文靖이라 쓰여 있다.


순조 14년 1844년에 발간한 율곡전서 부록3에는 李文成이라고 쓰여 있다.


아래는 류현우씨가 박약회보지에 기고한 기사이다.


 그는 이 기사의 말미에서 "사계의 재주가 어뚱한 모사에 쓰여 십만양병설이라는 허구를 만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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