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공 김약채는 생몰연대를 알 수 없으나 광성군(光城君) 김정(金鼎) 의 큰아들로 고려 공민왕 때 사람이다. 연산에서 광산김씨가 크게 번성하였던 것은 그의 연산 입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가 살았던 고려 말기에 나라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겹쳤다. 안 으로는 권문세족들의 횡포로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경제 질서가 문란 해졌으며, 밖으로는 북쪽으로부터 홍건적이 침입해 오고 서남쪽 해안 일대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날로 극심했다. 고려 말의 혼란기에 벼슬길에 오른 관찰사공 약채는 성품이 강직하여 자 신보다도 강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공민왕 때(1371년) 문과에 급제, 우왕 때 좌사의(左司議)2 로 있을 때 조반(趙胖)의 옥사(獄事)3 를 다스 리는데 참여하였다. 이때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이 조반에게 억 지로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참혹한 고문을 가했지만, 같은 자리에 앉은 관원들이 무엇이라고 감히 말을 못하였다. 이때 약채는 홀로 그 형벌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여 고문을 중지시키고 마침내 조반을 석방하게 하였다. 염흥 방은 그 뒤 죽음을 당하여 조야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이성계 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그는 도승지에 해당하는 지신사(知申事) 직위에서 이에 항거하여 외방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조선조에 들어와 그는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문하부(門下府) 좌산기상시(左 散騎常侍)라는 벼슬을 하였다. 그때 그는 훈친(勳親)들에게 사병을 허락해 주[許與]는 제도를 없애고, 병권을 모두 중앙에 집중시키고자 역설하여 마침 내 이를 단행하게 하였다. 당시에 사병혁파의 문제는 왕권강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 뒤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1404년(태종 4) 충청도도관찰출척사(忠淸道都觀察黜陟使)를 지냈다.
광산김씨의 선대가 언제부터 연산에 입향 기록은 없지만, 문중에서는 광산김씨의 연산 입향조로 관찰사공(觀察使公) 약채 (若采)을 꼽는다. 그는 연 산면 고정리(連山面 高井里) 거정(居正) 마을에 정착한 시기는 관찰사를 지 낸 뒤로 여겨진다. 그의 며느리인 양천허씨가 아기를 업고 개성에서 시댁인 연산으로 내려온 시기 등을 계산해 볼 때 관찰사공이 연산으로 입향 시기는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그가 관찰사 되었을 때 치소(治所)는 청주였다. 그가 관내를 순시하 다 계룡산 남서쪽 연산 땅에 들어서 보니 산세가 순하고 토지가 넓고 비옥 하며 인심 또한 순하여 고정리 거정마을이 마음이 들어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가문에 전해오고 있다.
『광산김씨 유향』에도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청주에 관찰사의 치소가 있었고, '산세가 순하고 토지가 비옥해서 정착했다고하나 나의 개인적 견해는 충곡서원에 있는 성삼문 유허비를 보면 성삼문의 선조 3대에 걸처 이곳 연산 한양말에서 관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양말은 고정마을과 1km채 안되는 가까운 곳에 있다. 나는 관찰사 치소(지금의 도청)가 청주에 있는 것도 맞다고 할 수 있으나 이곳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니면 치소의 분소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공민왕 때의 홍건적난이 평정된 뒤 임금의 파천(播遷)5 을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봉되고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른 원송수(元 松壽)의 딸인 원주원씨와 혼인을 하여 김문(金問)과 김천(金闡), 김한(金閑), 열(金閱)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이들 형제 중 무후한 김천을 제외한 3형제는 자손이 크게 번성했다. 첫째 검열공 김문, 셋째 총제공 김한, 넷째 퇴촌공 김열은 큰 파를 이뤘다.
관찰사공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 풍 양현(京畿道 楊州 豊壤縣)이나 실천했다. 그의 후손이 1936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1길 50-17 앞에 단(壇)을, 1998년에는 숭원재(崇遠齋)를, 2008년에 단을 세운터에 사당 모경사(慕景祠)를 지였다. 음력 10월 4일이면 세일사를 지내고 있다.
資憲大夫 忠淸道 都觀察黜陟使 贈 正憲大夫 禮曹判書 藝文館 大提學 知 春秋館知事 光山金公 若采 壇庭碑
자헌대부는 품계이고, 도관찰출척사는 벼슬이름으로 사법권까지 가지고 있다. 지금은 편의상 도출철관찰사가 정식 이름이지만 간편하게 관찰사로 호칭하고 있다. 증은 사후에 올린 벼슬이다. 정헌대부도 품계이다. 단정비는 묘를 실전하여 없을 때 단을 세우고 그 앞(정원)에 비를 세운 것을 단정비라고 한다.
좌측에 있는 비는 근래에 세운 단정비이다.
재실인 숭원재이다.
사당인 모경사와 묘정비이다. 모경사는 숭원재 바로 뒤에 있다.
관찰사공 세일사 때 축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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