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공 김국광(1415-1485)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문신이다. 그는 세조로부터 김국광의 박식한 재능을 높이 평가받아 세조가 직접 ‘사지제일(事知第一)’의 4자를 써서 하사받을 만큼 일처리를 잘 했다. 1466년 4월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7년 4월 우참찬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정부우찬성 겸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469년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맡았으나, 그 해 10월에 겸병조판서에서 해임되고 좌찬성으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이듬해 5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문폐사(問弊使)로 내려가 여러 가지 폐정 시정에 노력했으며, 8월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4월 좌의정으로 옮기고 5월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훈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8월에 아우 김정광(金廷光)과 사위 이한(李垾)의 부정 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다만 원상과 영경연사(領經筵事)만을 겸하였다. 일찍이 세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화려한 벼슬을 하면서도 평생 근신하며 살았다. 감찰공 철산의 네 아들 중 장남 김국광은 광산 가문의 첫 정승에 올랐다. 관 찰사공 약채의 증손이자 사계 장생의 5대조이기도 한 그는 조선 초기의 문 신으로 자가 관경(觀卿)이다. 호는 서석(瑞石)이며,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그는 화려한 경력을 지닌 광산김씨의 자랑스러운 인물이었다.
김국광은 영의정 황희(黃喜)의 손녀이자 증한성부(贈漢城府) 소윤(少尹) 황보신(黃保身)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슬하에 극뉵(克忸)과 한성좌윤공파(漢 城左尹公派)의 파조인 극니(克怩), 경력공파(經歷公派)의 파조인 극수(克 羞), 수사공파(水使公派)의 파조인 극괴(克愧), 강화경력공파(江華經歷公 派)의 파조인 극침(克忱)의 5남과 사위로 이한(李垾)과 이혜(李譓), 송여림 (宋汝霖)이 있다. 의정공 묘소는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鷄龍市 豆 磨面 旺垈里) 임좌 언덕 계룡 IC 앞에 있고, 그의 부인 정경부인 황씨 묘소는 의정공 묘소 바로 뒤에 있다.
처음 이야기는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의정공에게도 평생토록 후회하고 근신하며 살 아가야만 던 이야기이다. 의정공에게는 세 명의 아우가 있었다. 둘째가 공 안공 겸광(謙光)이고, 셋째가 첨정공 정광(廷光)이며, 넷째가 판교공 경광(景光)이다. 그가 좌의정으로 있을 때 셋째 정광은 제용감 첨정(濟用監 僉 正)14 벼슬을 하고 있었다. 제용감이란 국가의 물품을 수납하는 기관인데 그 때 첨정공이 첨정으로 있으면서 수뢰사건에 연루되어 막대한 국고손실을 입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지었다. 하필 그때 그의 사위이자, 직산현감 이한(李垾) 역시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았다. 정광은 중죄를 지었 음에도 나라에서는 의정공의 아우라는 명분으로 첨정공을 사형시키지 않고 중국으로 추방하였다. 이 때문에 의정공은 항상 재가 즉 가정을 다스리지 못한 죄책감에 후 회하며 근신하고 살면서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시호도 사양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아들의 이름도 항렬자인 ‘극(克)’자 밑에다 모두 ‘부 끄럽다’는 뜻을 지닌 ‘뉵(忸)’, ‘니(怩)’, ‘수(羞)’, ‘괴(愧)’를 붙여서 지었다. 이 는 “너희들이라도 자라서는 이런 부 끄러움을 잊지 말고 삼가는 마음으 로 살라.”는 뜻이다.
다음 이야기는 황희정승의 손녀사위가 되는 이야기이다. 의정공 국광은 영의정 익성공(翼 成公) 황희의 아들인 증 한성부 소 윤 황보신의 사위다. 그가 세종 때인 143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으로 뽑혔을 때, 황희 정승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김생은 “작게 될 사람이 아니다.”하며 공경하고 중히 여겨 반 드시 의관을 정제한 후에야 그를 만났다. 황희 정승이 어느 날 마침내 그를 손녀사위로 삼고자 하여 가족이 모인 자 리에서 “국광이라는 유생을 손녀사위로 삼고자 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 하냐?”고 물었다. 이에 황정승의 며느리가 “아버님! 그 사람됨이 너무 출중 하지 못하니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요!” 하며 반대했다. 이에 황희 정승은 며느리를 불러 조용히 이르기를 “사 람을 택할 때 그 사람의 장래성을 보 아야지 단순히 외모로 판단하는 것 은 옳지 않으니라.”고 타이르고 난 다음 마침내 국광을 그의 손녀사위 로 삼았다.
의정공 김국광의 묘역이다. 충남 계룡시 두마면 왕대2길 6-10 모원재 뒷편에 있다.
좌의정 광산부원군 김공묘라고 쓴 상석이다.
묘에서 서남방향으로 본 모습이다. 만국기 앞이 계룡IC이다.
김국광의 배위 장수황씨의 묘이다. 부군의 묘 뒤에 있다.
"유명 조선 좌의정 광산부원군 김공국광지묘. 정경부인 장수황씨 부후"라고 쓴 묘표이다.
문인석이다.
신도비각이다.
신도비이다.
앞면에서 본 신도비이다.
재실인 모원재이다. 이 재실은 묘소 앞 충남 계룡시 두마면 왕대2길 6-10에 위치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모원재 안내간판이다.
모원재 문이다.
모원재 현판이다.
의정공 김국광의 사당이다. 사당은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가운데에 삼문이 보인다.
사당 중수기이다.
사당 건물이다.
사당 내부에 탁자와 감실(작은 창살문 안쪽)이다. 불천위가 없는 사당은 4대까지 4위의 감실이 있으나 이곳 사당은 의정공은 불천위까지 포함하여 5개의 감실이 있다.
창살문을 열은 모습이다. 가운데 보이는 것이 감실이다. 이 감실 문을 열으면 위패가 있다.
의정공 김국왕의 종가이다. 사당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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