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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사계 김장생 이야기와 유허지(묘, 신도비, 재실, 종가)

by 仲林堂 김용헌 2018. 3. 10.

사계 김장생(1548-1631)은 예학의 종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과 함께 광산김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광산김씨가 양반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음은 사계와 신독재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두 분은 문묘에 배향되었을 뿐만아니라 사계의 후손에서 대제학이 7분이 나왔기 때문이다. 사계 선생의 일화와 그 유허지를 살펴본다.


다음은 이번에 발간하게될 '광산김씨 유향' 책자에 나오는 사계선생의 이야기이다.


사계 장생은 대사헌 계휘의 아들로 1548년 서울 정동(지금의 대한문 근처) 에서 태어나 논산군 연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자랐다. 율곡 선생의 뛰어난 제자로 그 당시 우리의 실정에 맞게 예법을 창안하여 실천케 함으로써 ‘동방예의지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벼슬을 탐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여 제자교육에 일생을 다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말과 행동이 점잖았다. 특히 율곡 선생 은 많은 제자 중에 장생을 특히 사랑하고 칭찬했다.


그의 아버지 황강 계휘가 평안감사가 되었을 때이다. 장생은 평양에서 살면서도 조금도 사리에 벗 어남이 없이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양에서 사귄 친구가 저녁놀이 붉게 물들 무렵 찾아왔다.

“여보게 사계, 늘 그렇게 책상머리에 붙어서 책과 씨름만 하긴가? 우리 바 람이나 쐬러 나감세.”

“고맙네, 하지만 지금 형편이 그러지 못할 사정이니 이거 미안해서 어쩌 지?”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곧 퇴청하실 때가 되어서 집을 비울 수가 없게 되 었네. 모처럼 만인데 미안하이” “그렇다면 낸들 어쩌겠나. 하지만 벌써 몇 번째인가? 그렇게 핑계만 대지 말고 다음에는 꼭 함께 나감세.” “애써 보기로 하겠네. 어쨌든 미안하게 되었네.”


그는 할 일 없이 나들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평안감사라면 울던 애기도 울음을 멈춘다는 세도 당당한 지위라서, 그 감사의 아들로 어 디를 가든 칙사 대접을 받는다는 것쯤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 라에서 네 차례나 사화를 겪은 끝이라, 나라꼴이 말이 아닌데 노래와 춤 등 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는 없었다.


1582년 그의 아버지 황강이 명나라에 종계변무(宗系辨誣)50 주청사 사신으 로 가게 되었다. 아버지를 여러 날 모시고 명나라 국경까지 따라가서 배웅을 하고 돌아온 장생은 아버지 생각에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객지 에서 편찮으시지나 않을까? 아버지의 그곳 중국 음식으로 인한 식사의 괴 로움은 겪지나 않는지 궁금하고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의 안녕하심을 빌고 아침마다 그쪽을 향하여 문안 절을 올렸 다. 이러한 장생의 지극한 효심에 보람이 있었음인지 명나라에서 소임을 마 치고 아버지는 무사히 귀국하였다. 하지만 수만 리 길이 힘들고 어려웠던지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병석에 눕게 되었다. 장생은 병간호와 봉양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종계변무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함께 갔던 역관 홍순언이 1587년 뜻을 이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생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어버이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효성이 부 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장생은 하늘을 우러러보기가 부끄럽고 사람 들 앞에 나서기가 민망스러웠다. 그는 아버지의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거기서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성묘 를 하였다. 그동안 목욕은 물론 세수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멀리하였 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죄를 지은 불효막심한 자식은 마땅히 벌을 받 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수염은 길을 대로 길었고, 머리는 산발을 하여 흡 사 귀신과 같은 몰골이었다. 갈아입지 않은 옷에서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쓰리고 아픔의 여막살이 3년 세월을 이렇게 보냈다. 어떤 경우이든지 부모 가 돌아가시게 되는 것은 그 자식들이 부모공양을 잘못하는 까닭이 있는 것이라 했고, 그 불효의 벌을 당연히 자식들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3년의 모범적인 시묘생활 이후부터도 그는 벼슬을 멀리하고 예절생활을 바로잡기 위하여 갖가지 예절을 연구하고 밝히는 예학공부에 힘써 『의례문 해』, 『가례집람』, 『상예비요』 등의 예법 책을 만들어 실행케 하니 백성들이 이를 지켜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우리나라는 예의바른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칭송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계 선생의 유허지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대부분 있다. 은농재가 사계 고택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실제는 사계고택이라고 할 수 없고, 사계의 계비 순천김씨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 김규가 어머니를 위해 마련한 처소이다. 사계의 묘는 고정리 산 7-4에 있고, 재실인 염수재는 고정리 178-1, 신도비는 염수재 아래 250m지점 도로변에 있다. 은농재는 충남 계룡시  두마면 두계리 96에 있다.


사계 묘역이다. 정면 앞쪽에 보이는 묘는 사계의 6대조모 양천허씨의 묘이고, 그 뒤 묘가 사계 선생의 묘이다.


좌측 첫번째는 목사공 김공휘의 묘, 그 뒤는 감찰공 김철산의 묘이다.


측면에서 본 사계의 묘이다.


정면에서 본 사계의 묘이다.


사계의 비석이다.


사계의 묘비와 묘이다.


사계 종가이다.


사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사계의 재실인 염수재 현판이다.



정면이 염수재이다.


사당에서 본 백일홍 나무이다.



사계의 신도비이다.


사계 신도비이다.

신도비 아래는 사계묘역으로 가는 도로이다.


사계 신도비이다.


왕당 김용승선생의 기념비인 "왕당김선생각제기사비"이다. 일제강점기에 총독이 사계 재실 염수재를 방문하려하자 이를 가로 막은 왕당선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은농재에 있는 사계 영당(影堂)이다.



영당 안에 있는 사계 초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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