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공이 서른 다섯살 되던 임진년(1592년)
왜구가 조선 땅을 짓밟자 천지가 혼돈으로 빠저들었다.
그 소용돌이에 뿌리채 뽑혀
고향땅 양평 양구를 떠나
정처 없이 몇 달을 떠돌던 세마 홀씨
가족과 노비를 이끌고 무주 덕유산에 이르렀다.
해는 서산에 지고
하룻밤 묵을 곳을 찾고 있었다.
그 때 건너편 숲속에 연기가 모락 모락 피어올랐다.
거기 백운암에서 만난 오수자 스님은 기나긴 뭄 끝에 단비였다.
오수자 스님이 길잡이가 되어 금강굴로 갔다.
금강굴에 불을 피고
그 안에 돌로 담을 쌓고 임시거처를 만들었다.
그리고 풀뿌리 캐고 나무 잎 뜯어 꺼진 배를 채우면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여
금강굴에서 나와
세마공은 이곳 안성면 사전마을로 내려와
양지바른 곳에 초가를 지었네.
사전땅에서 새싹은 돋아나고
낯선 땅에서 흔들림이 많았지만
풍파를 견디며 버티었네.
그리고는 마침내
역경속에서도 세파에 물들지 않은 채
꽃은 피우고
씨앗은 맷고 세를 거듭하면서 번성하여 학문과 덕행의 열매가 열렸다.
세마공의
4대손 성제공(誠齋公) 세륜은 호남제1 선비로 호남일사(湖南逸士)
8대손 경념당(敬念堂) 석모는 효행으로 칭송받았고
9대손 유은재공(裕隱齋公) 계현은 호남고사(湖南高士)
10대손 연심당(淵心堂) 영규는 충목공 신도비를 세웠으며 3천석군 부자가 되었고
10대손 하헌공(沙軒公) 영훈은 선덕군자(善德君子)로 호칭받았고
10대손 연서공(淵西公) 영구는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 과객을 가족처럼 접대하여 사후 시혜불망비가 세워젔으니
무주땅 핀 선비의 꽃 고귀하구나!
김용헌
김경조(金敬祖)의 자는 성보(誠甫)이고, 호는 퇴유헌(退裕軒)이며 무주 입향조이다. 퇴촌공후 충목공 김여석(金礪石)의 고손이며, 아버지는 진용교위(進勇校尉)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 증공조참찬(贈工曹參判) 김각(金慤)이다. 그는 1558(명종 무오) 한성부 정릉에서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벼슬은 선조 때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에 이르렀다.
세마공이 서른다섯 되던 해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한 관민은 저마다 병화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때 그는 가족과 노비를 이끌고 남으로 향하다가 무주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어 유숙할 곳을 찾던 중 마침 건너 편 산골 무성한 숲 속에서 한 줄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인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다가가 보니 백운암(白雲庵)이라는 조그마한 암자였다. 백운암에는 오수자(吳秀子)라는 스님이 혼자 기거하고 있었다. 오수자 스님은 그의 일행을 보고 놀라며 두려운 듯하였으나 곧 그 행색을 보아 피난민임을 알아차리고 따뜻하게 맞이하여 암자에서 유숙하기를 스스로 권하였다. 다음 날 오수자 스님은 그에게 “이곳은 많은 사람이 머물기엔 너무 협소할 뿐 아니라 오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어려워 은둔하기에 적절치 못하다”고 하고 덕유산 중봉의 석벽 아래 있는 금광굴(金光窟)로 인도하였다.
금광굴은 무주군 안성면 덕산리에서 길이 가팔라 도보로 3시간 거리에 있는데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의 동굴로써 그 내부가 넓어 수백 명이 기거해도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굴 밖의 지형 또한 일부러 조성한 요새와 같아 그는 ‘과연 난을 피할만한 곳’이라 경탄하며 오수자 스님의 보덕에 경의를 표한 다음 “이처럼 은폐된 천연의 요새를 만나게 된 것은 천신의 도움이며 조상의 음덕”이라 하였다.
세마공은 노비들과 더불어 터를 다듬어 임시 거처로 삼고, 난이 평정되길 빌었다. 금광굴이 있는 곳을 예전에는 광여산(匡廬山) 황곡(皇谷)이라 불렀으나 그가 이곳에 머묾으로 연유하여 그 이름이 바뀌어 덕유산(德裕山) 금광곡(金光谷: 광산김의 골짜기)으로 부르게 되었다. 호구를 지탱하기 어려워 풀뿌리 나무껍질로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해 심지어는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잘 버티어 난(亂)이 다소 평정되자 안주할 곳을 찾던 세마공은 무주군 안성면 사전리 모래터에 이르렀다.
노령산맥의 서쪽 사면 분지에 위치한 이 마을은 산수 자연의 경치가 매우 맑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앞쪽에는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이곳이 비록 오지이기는 하나 안전한 피난처인데다 농토가 많아 장차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넉넉히 누릴만한 곳이라 여겨 양지 바른 곳에 터를 잡아 초가집을 짓고 가족과 노비들을 하산시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어느덧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세마공은 해가 바뀔수록 두고 온 고향 소식이 몹시 궁금해 고향을 찾았으나 전란 중에 자손들이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선영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 후 그는 해마다 수백리 길을 멀다 않고 경기도 양평의 양근까지 가서 선영에 성묘를 하였으나 환란이 거듭되는 세상이라 장차 실묘(失墓)할 까 염려하여 1603년 위로 4대의 묘소를 동시에 무주군 안성면 사전리 미륵암산으로 이장했다. 묘소를 이장할 때 고인들의 유덕을 기리는 관민이 유숙하는 곳마다 조문을 하였는데 그 행렬이 80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인조 병자(1636년)에 79세에 타계하여 묘는 무주군 안성면 사전리 고사봉하 독산 간좌이며 후손들이 음력 10월 9일 세일사를 봉행하고 있다. 그의 후손들이 누대를 이어 400여 년간 세거하고 있는 안성면 사전리는 9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양지담, 평지담, 웃말, 모종안 등 4개 마을에 8.15 광복 당시만 하여도 170여 세대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30여 세대가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
세마공의 벼슬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을 했다. 세자익위사는 왕세자 시중을 드는 관청이다. 이곳에서 세자의 말을 돋보는 일이니, 지금으로 보면 왕세자의 마부로 계급이 낮은 공무원이다.
작다고 고귀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가난하다고 선비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작으면서도 빛나고, 가난하면서도 아름다웁고, 아래에 있으면서 품위가 있으면 오히려 높으면서도 고귀한 것보다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선조 중에는 그런 민초가 많이 있으나 사람들은 흔하다고, 작다고 무시한다. 작지만 고귀한 민초 중 하나가 세마공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아호를 퇴유헌(退裕軒)이라고 했듯이 물러나 있으면서도 넉넉한 마음이었고, 그의 후손은 하나같이 선비다웠다. 그의 10대손 사헌공 김영훈이 회갑을 맞아 그의 친구 이병관은 "회갑을 축하는 시(詩)가 산더미 같이 쌓였다"고 했다. 그의 증손자가 그 시를 모아 유고집을 발간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이곳을 세마공의 13대손이며, 광산김씨충목공파 도유사인 김창중씨의 친절한 안내로 제월정, 충목공과 세마공의 유허비가 있는 인기각, 도산서원, 충목공의 묘소, 세마공의 묘소를 지난 2월 1일 방문했다.
무주 덕유산 금강굴이다. 이곳에서 세마공 김경조는 임진왜란 때 은신한 곳이다. 광산김씨들이 피난했다고 해서 김광굴(金光屈)이라고 하며 그 골자기를 금광곡(金光谷)이라고 부른다. 다음 지도에는 오수자 스님이 계셨던 곳이라고 하여 오수자굴이라고 나와 있다. 이 사진은 충목공파와 세마공파의 도유사 김창중씨의 동생 김택중씨께서 보내 온 사진이다.
세마공 김경조가 금강굴에서 피난한 후 정착한 무주군 안성면 사전리 마을이다. 이 마을 앞에 있는 정자 사전정이다.
사전정에서 서쪽편 사전마을이다.
사전마을에서 본 눈 덮힌 덕유산이 보인다.
세마공 김경조의 유허비이다. 翊衛司 洗馬光山金公 號退裕軒 諱敬祖 遺墟碑
풀이하면 익위사 세마인 광산김공이며, 호가 퇴유헌이고, 경조의 유허비이다. 이 유허비는 충목공 김여석의 유허비 옆에 있고, 이 비석의 비각은 인기각(忍嗜閣)이다.
김필수가 그의 아버지 김영훈을 위하여 이 정자 제월정을 1940년 4월 8일 준공했다.
도산서원이다. 이 서원은 충목공 김여석과 세마공 김경조의 학문을 후대에 잇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지금으로 보면 사립중고등학교와 같다.
도산서원이 양지 바른 곳에 있고, 우측에 세마공의 묘소가 있다.
조선국 병절교위 익위사 세마 광산김공 휘 경조지묘
공인 죽산박씨 부좌
세마공 김경조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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