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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자손에게 벼슬 못하게 한 기인 담암공(潭庵公) 용석(用石) 이야기

by 仲林堂 김용헌 2018. 2. 12.


안동의 구담(九潭)은 용궁(龍宮)과 예천(醴川)의 접경이다. 앞으로 낙동강을 굽어보고 세 고을 백성들이 연안을 끼고 사니 집이 이어져 큰 마을을 이루었는데, 그 북쪽 용궁산 위에 진사 담암 용석의 무덤이 있다.

()가 연숙(鍊叔)인 그의 고조는 관찰사 약채(若采)이고, 증조는 형조도관좌랑 퇴촌공 열()이며 할아버지는 직장 달손 (達孫)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수()이먀 충목공(忠穆公) 여석(礪石)은 그의 친형이다.

그는 1453(단종 계유)에 태어난 사람으로 집안 대대로 서울 동문 밖에 살았다. 20세에 성균관 진사에 합격하였고, 점필제(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더니 1472(성종 12)에 진사과에 합격한 뒤 당시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장안십철(長安十哲)의 수좌(首座)로서 명성을 떨쳤으나 연산군 초에 가솔을 이끌고 부인의 고향인 구담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자손들이 그 집을 지키며 8-9세를 전해 오는 동안 그의 뒤를 이어 문학이 뛰어난 8형제가 이어왔건만, 그의 묘 앞에 세워진 비에는 성과 이름만 있을 뿐, 현각(顯刻)은 없다.

세상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그가 임종할 때 책상 위에 있던 글들을 모두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이름을 세상에 남기지 않으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자손들도 그의 유지(遺志)를 따라 비에 일체의 사적을 적지 않고 성과 이름만 새긴 것이었다.

그가 떠난 지 300여년이 되었으니 당시의 일을 구체적으로 고증할 수가 없다. 다만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기록한 스승과 제자의 삶에 그의 이름이 보이고, 중화(中和) 강응정(姜應貞)의 기사에 그가 어릴 때 주문공(朱文公)의 글을 고사를 모방하여 향약을 설정하고 항상 매월 초하루마다 태학관(太學館)에 모여 소학을 강론하였는데 그 때 뽑힌 사람은 모두 한 때의 명사이니 김용석(金用石) 연숙(鍊叔), 신종호(申從濩) 차소(次韶), 박연(朴演) 문숙(文叔), 손효조(孫孝祖) 무첨(無忝), 정경조(鄭敬祖) 효곤(孝昆), 권주(權柱) 지경(支卿), 정석형(丁碩亨) 가회(嘉會), 강백진(康伯珍) 자온(子韞), 김윤제(金允濟) 자주(子舟) 등이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라 했고 끝에다 세상에 그 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떠들며 말하기를 소학은 효자의 문서일 뿐이다라 하고 부자(夫子)와 사성십철(四聖十哲)을 기롱(欺弄)하는 바 있다.”라고 했다.

추강은 한 때 뛰어난 문사(文士)로 장안의 빼어난 선비[俊士] 중 쓸만한 사람 열 사람을 꼽는데 그 우두머리로 뽑힌 사람이다. 그가 살았던 성종 때는 조정에서 인재를 양성하는데 일시에 재주가 빼어난 사람이 많았다. 그 때 태학관에 향약을 설정하고 소학을 강론한 것은 옛 도를 세상에 밝히려 함인데 이를 막고 희롱하는 이가 있으므로 담암은 이 도가 행하지 못할 줄을 알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그의 동문(同門)에는 한훤당(寒暄堂) 정여창(鄭汝昌)과 같은 어진 선비도 이 학문으로 몸을 닦고 후학들에게 전수하려다가 마침내 화를 당했고, 정암 조광조(趙光祖)도 한훤당에게 수학하여 이 학문을 세상에 시험하려다가 마침내 1519(기묘)에 화를 입었다.

아마도 학문이 순수하고 바르며 지혜가 깊고 넓었던 그는 이처럼 동인(同人)들이 무오, 갑자년의 두 사화에 연루되어 죽는 것을 보고서 초연히 물러나와 빛을 숨기고 신분이 몰락한 것을 한탄하지 않으면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보아진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어떤 사람이 그의 담암에 투장(偸葬)을 하였는데, 그 고을 원이 그 사살을 조사하러 나왔다가 그의 묘 앞에 서 있는 비를 보고는 놀라서 울며 이 어른의 산소가 여기에 있는 줄을 내가 생각하지 못했다하고 제문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고 갔다고 한다.

이 후 그의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짓고 그의 묘에 세일사를 올리는데 그의 9대손 광현(光鉉)은 유적이 민멸(泯滅)될 것을 염려하여 일가들과 상의하여 돌을 깎아 그의 사적을 실어 새로이 비를 세웠다.


담암공은 학문이 순수하고 사려 깊어 천문과 시세의 변화를 짐작하고 성종 말엽에 부인의 고향인 구담에 은둔했다. 그 후 연산조에 동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이, 조광조 등 명현이 참혹한 화를 당했으나 선생은 초연한 군자로 산수간에 묻혀 화를 면했다.

 

선생은 자손에게 양반의 후예로 학문에 힘써 진사는 하되 대과는 응시하지 말라고 명했는데 셋째 아들 시가 무과에 등과하여 성주목사가 되자 계명을 어겼다며 부자관계를 끊는다며 구담에는 오지 마라하여 그 후 200여년간 왕래 없이 지냈다고 한다.

구담 중심거리에는 담암공 유허비가 있다. 구암에는 또 섬마길이란 지명이 있다. 이 길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예천 방향에서 한 어린이가 오고 있었다. 담암공이 너의 성이 뭐냐물으니 류()가라고 했다. 그 아이가 범상하지 않게 보여 데릴사위로 길렀다고 한다. 그가 버들 류씨이니, 버드나무는 물가에서 잘 살고, 그렇다면 물이 많은 곳이 섬이니 사위가 사는 곳을 도()촌이라고 했고, ()섬이섬마길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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