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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광원군이 처가로부터 조선 8대 명당을 차지한 이야기

by 仲林堂 김용헌 2018. 2. 10.


광원군의 묘소는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데 조선의 8대 명당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산세가 웅장한 기세에 전후좌우, 청룡백호와 현무주작이 기세등등하게 큰 명당 터를 이루어 세상에서는 만대발복지지(萬代發福之地)’라고 일컫는다. 많은 풍수가들은 광산김씨가 조선조에서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이 예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문묘배향 18 가문에서 2명이나 들어갔고, 정승 3, 대제학 7, 왕비 1명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신현관을 배출해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가문으로 유명을 떨친 게 결코 이 묘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마흘리 마을 바로 뒤로 잘 닦여진 가파르지 않은 잔디 길을 100m쯤 오르면 언덕 위에 왕릉을 축소해 놓은 듯한 큰 묘소 셋이 일직선으로 눈에 들어온다. 충청도 묘들과는 달리 용미(龍尾)가 없이 큰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을 한 세 개의 묘소는 맨 앞이 대사간 김극뉴의 묘소이고 그 뒤가 박씨 부인이며, 맨 위가 박 감찰의 묘소가 된다. 그리고 김극뉴의 묘소 아래에는 그의 둘째아들인 소윤(昭胤)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로 그 자손들의 묘가 여러 개 옹기종기 늘어서 있다.


이 광원군이 이 명당을 차지 할 수 있었던 다음 같은 설이 있다.

그 첫째는, 원래 광원군이 묻힌 자리는 그의 첫 번째 부인의 아버지 함양 박씨(咸陽朴氏) 감찰(監察) 박예(朴隸)의 신후지지(身後之地)였다고 한다. 그의 장인은 3형제로 모두 풍수지리에 능통한 도사(道士)들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자신들이 죽으면 묻힐 신후지지를 잡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큰형인 박 감찰은 이곳의 말 명당을, 둘째는 임실 갈담의 잉어 명당을, 셋째는 임실 가실 마을 앞의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을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 감찰에게는 아들 없이 외동딸만 있었는데, 김극뉴에게 시집을 가서 22녀를 낳고 일찍 별세하였다. 박씨 부인의 친정에서는 이웃 마을에 사는 부덕을 겸비한 의령 남씨를 중매해서 그의 재취부인으로 보냈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20세였다. 인품이 순후한 남씨 부인은 김극뉴의 재취 부인으로 들어온 뒤 전실의 친정 박씨 댁을 친정처럼 생각하고 왕래를 하였고 한다. 남씨부인은 전실의 친정에 들려 자다가 달이 밝아 뜰에 나갔더니 뒷산 등성이에서 벙거지를 쓴 사람(귀신)들이 모여서 이곳(박 감찰의 묘 자리를 가리킴)은 무자손(無子孫)의 땅이고, 저기는 금관자 옥관자 서 말이 나는 만대발복지(萬代發福地)라고 수군거리며 묘를 쓰는 것 같았다. 괴이하게 여기다가 이튿날 아침 일찍 그곳에 가서 살폈으나, 묘를 쓴 흔적이 전혀 없는지라, 그래도 그대로 넘길 일이 아니어서 진산군수로 재직 중이던 장남인 종윤(宗胤)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전했다. 군수는 곧 이름난 지관을 데리고 현지를 답사하니, ‘만대영화지지가 맞다하여서 이곳에 대사간의 묘를 이장하였다고 한다.  

 

둘째는 박 감찰은 슬하에 외동딸만 있어 지신의 제사를 받들어줄 아들이 없으므로 사위가 좋은 자리에 들어가 외손이 번창하면 자신의 제사는 받들어줄 것이라 믿고 사위인 김극뉴에게 자신의 신후지지를 양보하고, 자신은 그 뒤의 입수도두 부분에 묻혔다고 한다.

셋째는 박 감찰이 사위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이 자리가 아주 좋은 자리임을 안 딸이 꾀를 써서 채갔다는 것이다. 박 감찰이 죽어 이 자리에 묻으려고 묘를 쓰기 전날 광중을 파 놓았는데 시집을 간 그의 딸이 이날 밤 광중에 물을 잔뜩 부어버렸다. 다음날 상주들이 하관을 하려고 하니 광중에 물이 차 있어 그 자리를 피해 바로 윗자리에 박 감찰의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박 감찰의 묘는 김극뉴 묘의 바로 위에 있다.

아무튼 이 자리는 외손발복지지(外孫發福之地)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그 영향으로 그의 후손들이 불같이 일어났다고 한다.


대사간 김극뉴의 계배(繼配) 정부인(貞夫人)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자손이 없이 살다가 1525(중종 20)에 타계하여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거정마을 뒷산에 신좌(申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8대손 진옥(鎭玉)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뒤에 후손들은 그 묘소 바로 아래에다 재실 영사재(永思齋)를 지어 그분의 덕을 추모하고 있다.


풍수가들은 봉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형국에서는 후손 중에 말을 타는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큰 벼슬을 하는 후손이 나온다고 한다. 이곳 지형이  천마가 하늘로 오르는 천마등공(天馬登空) 명당이라고 한다.  이는 과학적으로는 해석이 안되지만 뒤에는 산이 있고(背山) 앞에는 물이 있으며(臨水), 옆에는 좌우산은 청룡(靑龍)이오, 백호(白虎)라면  현실적으로 뒷산은 바람을 막고 앞은 열려 있어 양지바르고, 옆으로는 균형잡힌 풍경을 만들어내고, 물이 있으니 살기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곳을 지난 2월 1일 찾았다. 정읍 산외면에서 순창읍내를 지나  21번 도로를 타고 마흘리 앞에 이르자 하나의 산봉오리가 시야에 들어 왔고, 그 아래에 묘소가 멀리서 보였다. 이곳이 조선8대 명당 대사간 김극뉵의 묘라는 직감했다. 마을회관에 들어가 여쭈니 역시 예상한대로 광원군 묘였다.


천마산 아래 광원군 김극뉵의 묘이다.


광원군 묘의 석물이다. 좌측부터 문인석, 동자석, 동자석 뒤 묘갈, 묘비이다. 묘비는 후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묘갈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대사간(司諫院) 대사헌(大司諫) 김공지묘(金公之墓), 숙부인(淑夫人) 박씨지묘( 朴氏之墓)라는 글자가 새겨 있다. 맨 앞이 대사간 묘이고, 뒤가 부인 박씨묘, 그 뒤에 사돈이 되는 부인 박씨의 아버지 박감찰의 묘가 있다.


박씨부인 묘에서 바라본 전면이다. 뒤에서 기(氣)가 내려와 이곳에서 끝이라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뭉치는 혈(穴)자리라고 한다.


광원군의 둘째 아들 김소윤 등 그 후손의 묘는 좌향이 광원군의 묘와 약간 동쪽으로 틀어져 있다.


마흘리 동내 앞에서 본 천마산이다. 재실은 좌측 맨 뒤 기와집 건물이다. 재실 왼편으로 솔밭 사이로 난 길을 오르면 대사간공의 묘가 나온다.


앞에 있는 천마산의 봉우리 둘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해서 있다.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다. 그래서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고 한다.


재실 영사재 이다.





대사간공의 장인이되는 박감찰의 묘와 묘비이다.


가운데 혈이 모이는 자리에 광원군 김극뉵의 묘가 있고, 좌에 청룡의 산줄기가, 우에는 백호의 산줄기가  뻣어 나왔다. 혈이라는 것은 기(氣)가 뭉친 곳이라고 한다. 세상 모든 것은 기(氣)와 이(理)가 아닌 것이 없다고 유가(儒家)에서 말하고 있다. 물은 얼으면 고체가 되기도 하고 증발하면 수증기로 되어 눈으로 볼 수 없는 기체가 된다. 이와같이 어떤 사물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한다는 것이다. 인간도 죽으면 육체는 없어지지만 혼백(魂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은 하늘로 가고, 백은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기(氣)가 산맥을 타고 내려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 모인다고 한다. 그곳을 혈(穴) 자리라고 한다. 그런 곳에 묘를 쓰면 후대에 발복한다는 것이다.


지도 스카이뷰에서 본 광원군 김극뉵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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