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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공안공 김겸광(金謙光)의 이야기와 유적(묘, 신도비, 사당, 재실) 둘러보기

by 仲林堂 김용헌 2018. 3. 11.

공안공 김겸광은 광산김씨공안공파의 파조로 세조 때 이름을 남겼다. 그의 유적으로는 묘소, 신도비, 사당, 재실이 있으며 사계 김장생 선생 묘역에서 모두 가까운 곳에 있다. 묘와 신도비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 12-18, 사당은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18와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18, 재실 승모재(承慕齋)는 부적면 신풍리 537에 있다. 그는 부조지전을 받은 불천위로 기일은 음력 7월 19일이다.


다음은 금년 3월 31일 종려나무에서 발간하게되는 『광산김씨 유향』에 나오는 김경광 관련 내용이다.


공안공 겸광은 감찰공 철산의 네 아들 중 둘째이며, 관찰사공 약채의 증손 이자 의정공 국광의 동생이다. 그는 자가 휘경(撝卿)이고, 시호는 공안공이 다. 그는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는 1419년에 태어나 1457년(세조 3)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한림으로 감찰, 정언, 병조좌랑, 정랑, 사헌 부 장령을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직책을 다하였다.


세조 임금은 1460년 북쪽 오랑캐 랑이승합(浪伊升哈)이 변방을 침범하자 함길도체찰사 신숙주를 원수로 삼고 그를 종사관으로 삼아 정벌하였다. 또 명을 받고 건주위(建州衛) 이만주족(李滿住族)을 토벌하여 개가를 올리니, 그 공훈으로 5계급을 뛰어 통훈대부에 올라 군기감정에 배수되었다. 그해 10월 14일 함길도 도체찰사 신숙주, 부사 홍윤성과 함께 공이 세조 임금을 알현하니,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그가 우부승지에 오르고 그의 형님 국광이 호조판서로 있을 때 임금이 그 의 사모를 벗기고 꽃을 꽂아 주며 이르기를 “네가 형보다 벼슬은 낮으나 형 보다 현량하다.” 하고 또 술을 권했다. 임금은 낭이승합이 원한을 품을까 염 려하여 특별히 “겸광으로 하여금 회유하게 하라.” 하니 그는 그곳으로 가서 위안하였다.


이어 그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공을 세워 순성명량좌리공 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으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1475년 정조 사(正朝使)16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2년 황해도 지방의 기근을 구제 하기 위해 황해도 진휼사가 되었다. 이듬해 우참찬이 되어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상례를 주관 하였고, 창경궁과 세자궁 중수의 책 임을 맡아 처리하였다. 1484년 좌참 찬(左參贊)이 되고, 1486년 세자좌빈 객(世子左賓客)17이 되었다. 그는 문관이었으나 외적의 침입을 막는 지휘관으로서 빈틈이 없었다. 그는 비록 활을 잘 쏘거나 말을 잘 타 지는 못했으나 지략이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맡으면 잘했다. 그래 서 그는 비록 몸은 하나이지만 쓰임 은 백가지가 넘는다고들 하였으며, 안으로 들어오면 재상이오, 나가면 장수라고 했다.


1487년(성종 18)에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는데 곧 졸(卒)하니 72세였다. 천성이 순후하고 일을 처리함이 주밀(周密)하였다. 시호는 공안인데 일을 공경히 하고 위를 받드는 것이 공(恭)이고, 좋아하고 화(和)하여 다투지 아 니하는 것을 안(安)이다. 시로는 비록 듣기는 좋으나 文 → 貞 → 恭의 순서이니 정광의 행장 탓이라 생각된다.


다음은 그가 지은 '정북시지육진(征北詩至六鎭)'  시이다.


극천관새편경과(極天關塞遍經過) 하늘에 닿은 관새를 두루두루 지나

재척고산우수애(才陟高山又水涯) 간신히 높은 산을 넘으니 또 물일세.


음학천추여적설(陰壑千秋餘積雪) 천년간 패인 골짜기에 아직도 눈이 있고

심림유월유잔화(深林六月有殘花) 6월 깊은 숲속에 꽃이 남아 있네.

거인지시전선속(居人只是田宣粟) 주민은 단지 조농사만 짓고

원객편경판작가(遠客偏驚板作家) 멀리서 온 손님은 판자집에 놀라네.

경접북융풍속이(境接北戎風俗異) 북쪽 오랑캐 접경은 풍속이 다르고

무시무주나수하(無詩無酒奈愁何) 시가 없고 술이 없으면 어찌 시름 보낼까


공안공은 청백리(淸白吏)18에 뽑혔다. 그는 1476년(성종 7) 겨울 정조사로 명나라에 갔다. 명나라 황제는 공을 영민하고 준수하다며 좋게 보았고 융숭 한 대우를 했다(皇帝甚愛重其爲人英俊). 공은 명나라로부터 비단, 금 등 많 은 하사품을 받았다. 이듬해 봄에 명나라에서 돌아올 때 황제의 선물을 하 나도 착취하지 않고 모두 궁으로 가져왔다. 당시 중국에서 돌아올 때 도난 당했다는 등 핑계로 착복하는 경우가 많아, 성종은 사람을 시켜 공안공 집 을 살펴보았으나, 대문은 싸리문이었고 담장은 무너져 있었다. 공의 이런 사실이 알려져 청백리로 뽑히게 되었다.



공안공 김겸광의 묘역이다. 그는 풍수에 밝아 자신이 묻힐 곳을 두계 왕대리와 이곳 고정리 두 곳을 찾고, 지사(地師)를 불으니, 그는 "왕대리는 대대로 영화를 누릴 곳이며, 고정리 터는 길지입니다."고 했다. 공안공은 형에게 찾아가 형이 있은 후에 동생이 있으니 형에게 왕대리 묘역을 드렸다고 한다. 형 의정공 김국광은 계룡IC앞 계룡시 왕대리 묻혔고, 자신은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양천허씨 묘역(사계 김장생선생 묘)인 이곳에 묻혔다.  


내외 분 묘이다.  


묘 앞쪽은 거북 꼬리 모양이다.

문인석, 묘비, 묘갈 등 석물이 보인다. 


묘갈이다.


묘비이다.  의정부 좌찬성을 증직 받았고, 세자의 두번째 선생이며,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했고, 시호가 공안이며, 광성군을 작위를 받은 김겸광의 묘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삼척진씨이다. 좌찬성은 판서와 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사의의 벼슬이다. 판서에서 정승이 되려면 찬성에 오른 후 정승에 오른다.


측면에서 본 묘소이다.


묘에서 동남 방향 100미터 지점에 세운 신도비이다. 신보비는 2품이상의 벼슬에 오른 분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으로 지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묘가 있는 길가에 세운다. 

 

신도비 뒷편에 그의 묘가 보인다.


훌륭한 신도비이다.


공안공 사당 앞 삼문이다. 사당은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 사당이 본래 있었던 곳은 지금은 수몰이 된 탑정저수리 안천마을이었다. 수몰이 되면서 이곳 부적면 신풍리 18번지로 이건했다.


정면에서 본 사당이다.


밖에서 본 사당이다.


위패를 봉안한 사당 내부이다. 위패는 감실에 들어 았다. 감실은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공안공의 불천위로 맨 좌측에 있다. 그의 감실과 위패는 변함 없이 그 자리에 있는다. 



공안공 겸광의 재실 승유재(承裕齋)이다. 승유재 뒤에 있는 건물이 공안공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이다.

 

부적면 충곡리 충곡서원에 있는 '성선생(성삼문) 유허비'를 찬한 우암 송시열은 이곳을 추노지향(鄒魯之鄕: 맹자와 공자의 고을과 같이 예의 법도가 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이곳은 지금 행정구역은 연산면과 부적면이지만 예전에는 연산현에 속하였다. 연산현에는 충곡리는 성삼문 선생의 유허지며, 연산면 고정리와 임리는 의정공 김국광과 공안공 김겸광의 고향이며, 그 후 문묘에 배향된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 선생의 출신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광산김씨관련 많은 유적이 있다. 돈암서원, 충곡서원, 휴정서원이 있고, 사계 선생과 신독재의 사당이 있다. 이름을 남긴 분의 묘소가 많다. 그 외에도 계백장군의 묘소와 군사박물관, 탑정저수지와 수변생태공원 등도 둘러 볼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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