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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해석

김용겸(金用兼)의 行狀

by 仲林堂 김용헌 2018. 1. 8.

광산김씨 공안공후 평정공후 김용겸(金用兼)의 10대손 용준이 소장하고 있는 선조의 행장 중 간곡 김용겸의 행장이다. 이 글은 용겸의 고손자가 쓴 것이다. 이 해석에 수원향교 유선종 장의와 칠현 윤한택 선생으로부터 도움 받아서 했다.  


 아래는 위 글의 해석이다.

처사공은 두 아들을 낳았다. 장자는 용겸이고, 둘째는 하겸이며, 이 두분은 나의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용겸은 자가 성보이며, 효묘 8년(1657년) 정유 9월 30일 을해 출생했다. 공이 5살 때 우암 송선생이 처사공을 냇가위에서 만나 공(부군)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헌걸차니 크게 되겠다고 처사공에 말하기를 공의 자식이 10살이 되거든 나에게 보내주라며 자기 자식과 같이 가르치겠다고 했다. 공이 9세가 되자 (송우암) 선생이  장차 황산(八卦亭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였을 때, 또 부군을 두루 보았는데, 반응 대답하는 것이 마치 성인같았다.  크게 기특해 하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부모) 품을 면하고 외지로 나아갈 만하다."고 하고는, 드디어 데리고 갔다.


기사년 5월 우암 선생이 생사고비를 헤매실 때 공은 달려가 뵙고 돌아가시자 삼베옷으로 갈아 있고 조문하고 운그를 따라 장례를 치루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제사에 참배했다.


신미년 2월 우암의 손자 송은석이 선생의 유고를 공에게 정서를 요청했다. 공은 선생의 제자 중에서 뛰어난 명필가였기 때문이다.


갑술년 윤선거를 돈암서원에 배향하자는 좋지 않은 여론이 있었다. 이에 공이 정론을 펼치자 그들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지사 만증은 사악함을 누르고 바른 것을 세웠다고 칭송했다.


공은 가례를 준수했다. 음주를 삼가하고 집안을 교화했고, 종복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경묘년(1722년)졸하니 향년 66세다. 처사공이 내려 보이는 곳에 부인 송씨(계사년 12월 23일 생하여 병술년 12월 초6일 졸 향년 54세)와 쌍묘이다. 자식이 없어 충의위공 하겸의 자식 상연을 후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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