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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화양동구곡 암각문을 보며

by 仲林堂 김용헌 2017. 7. 22.


화양동구곡을 찾아서

 

성균관 유교활성화사업단이 주관한 향교서원 전문가 양성교육이 2017717일부터 719일까지 23일간 청주향교에서 있었다. 그 교육 과정 중 유교유적답사 차 40명의 참가자와 함께 화양동구곡(華陽洞九曲)을 찾았다. 장마 뒤 햇살은 뜨거웠으나 숲속에 품어 나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우암 송시열 선생이 남긴 화양동구곡 유적을 답사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60세 되던 16668월부터 화양동에 계당(溪堂)을 짓고 거처를 시작하면서 그가 회덕으로 돌아갔던 16864월까지 화양동에서 20년간 살았다. 우암과 그의 제자들은 이곳 구곡의 바위에 많은 암각문(巖刻文)을 새기는 등 많은 유적을 남겼다.

 

일행은 충북자연학습원 교차로에서 하차하여 화양동구곡의 맨 끝에 있는 제9곡부터 1곡까지 역순으로 내려갔다. 파천 쉼터 신작로에서 5분여 계곡으로 내려가자 제9() 파천(巴串)이 나왔다. 냇물 평평한 바위를 넘는 모습이 용의 비늘이 꿰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파천(巴串)이라 한다. 큰 바위에 파천이라 암각이 있고, 둘레에 큰 바위에도 이름을 새긴 암각이 여기저기 보였다.


파천에서 1km쯤 내려오자 제8() 학소대(鶴巢臺)를 만났다. 학소대는 학이 둥지가 튼 곳이라 붙인 이름이다. 나는 잠시 소나무에 학이 노니는 선계(仙界)를 그려보았다. 학소대에서 조금 내려오면 제7() 와룡암(臥龍巖)이다. 계곡을 따라 누워있는 바위가 마치 용이 드러누운 모양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와룡대에는 와룡암이란 전서체 암각이 있다. 와룡암에서 조금 내려오면 우측 산 아래에 우뚝 솟은 큰 바위 하나가 있다. 이 바위가 구름을 찌른다는 능운(凌雲)이란 이름의 제6() 능운대(凌雲臺). 늠름한 선비의 모습과 같다.

 

능운대 건너편 계곡을 따라 가자 절벽 큰 바위에 새긴 숭정황제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과 우암의 글씨인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암각문을 만난다. 비례부동은 공자의 제자 안연이 인()을 이룰 수 있는 덕목이 무엇이냐고 공자에게 여쭸을 때 공자가 대답한 네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四勿)’이다. 즉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廳),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非禮勿動)이다.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중국은 명이 망하고 청나라 오랑캐가 차지하고 있으니, 이제는 대명(大明=중국)의 땅(天地)은 여기 조선이라, 숭정(崇禎)은 중국 명나라 의종황제이다. 숭정의 해와 달이니 뜨니 여기가 중화라는 것이다.


좌측 비례부동은 명나라 숭정황제의 어필이고, 우측 대명천지숭정일월은 우암의 글씨이다.

  

능운대에서 내려 와 다리를 건너면 산 중턱에 층층이 큰 바위가 있고 맨 위에 큰 바위 하나가 있다. 이 바위 위에서 별을 관측했다고 한다. 여기가 제5곡 첨성대(瞻星臺). 첨성대에는 의미 깊은 암감문이 있다. 첨성대 아래 큰 바위에 선조의 글씨인 만절필동(萬折必東)과 숙종의 글씨인 화양서원(華陽書院)이란 암각이 있다. 만절필동은 황하(黃河)가 만 번 굽이 처도 결국은 동()으로 간다는 뜻으로 동()은 원래 중국의 동쪽을 가리키나 우리나라로도 볼 수 있다. 황화의 문명은 결국은 조선에까지 이른 다는 의미로 넓혀본다


첨성대 암벽에 있는 선조의 글씨인 만절필동(萬折必東)과 숙종의 글씨인 화양서원(華陽書院)  암각문이다.

 

첨성대에서 1km쯤 내려오면 제4() 금사담(金沙潭)이다. 우암은 금사담 계곡 건너편에 초가 3칸 집(溪堂)을 지었다고 한다. 우암이 서거한 후 암서재(巖棲齋)를 지었다고 한다. 암서재 옆 직립한 바위에 창오운단 무이산공(蒼梧雲斷 武夷山空)이란 우암의 쓴 암각문이 있다. 창오운단에서 창오(蒼梧)는 순임금이 죽은 곳이다. 창오에 구름이 끊어졌으니 더 이상 요()()()()(文王)(武王)주공(周公)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이 끊겼음을 이야기하고, 그 끊긴 도통을 무이산에서 공부한 주자(朱子)가 이었으나 이제 무이산도 비었다며 도통이 끊어졌음을 한탄한 말이다. 금사담에서 또 하나의 암벽에 새긴 큰 암각은 명나라 태조의 글씨인 충효절의(忠孝節義)이다


금사담에 있는 암서재이다.  

 

암서재에서 조금 내려오면 제3() 읍궁암(泣弓巖)이다. 북벌을 꿈 궜던 효종의 기일(忌日)에 우암이 통곡했다는 바위이다. 읍궁앞 옆에 우암의 유언에 따라 우암의 제자 권상하등이 중국의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만동묘와 우암의 영정을 모신 화양서원이 있다.



명나라 신종과 의종 황제를 모신 만동묘이다.

 

읍궁암 아래에 계곡 건너편에 큰 암벽이 있고 그 앞에 못이 있다. 이 못에 구름 그림자가 비춰 이름 붙인 곳이 제2곡 운영암(雲影巖)이다.

 

운영암에서 1km아래에 제1곡 경천벽(擎天壁)이 있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하여 붙이 이름이다. 경천벽에는 우암이 쓴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 새긴 암각이 있다.

 

이곳 화양동은 원래 황양동(黃楊洞)이라고 불렀으나 우암이 이곳에 들어와 그 이름을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처 불렀다고 한다. ()는 중화를 뜻하고 양()은 일양래복(一陽來復)에서 따왔다. 화양동구곡의 구곡(九曲)은 중국 유학의 도통을 잇는 주자(朱子)가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처음 사용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율곡이 고산구곡(高山九曲)에서 처음 사용했으며, 우암이 화양동에 구곡을 붙였다.

 

우암과 그의 문인은 중국의 명나라가 망해버린 마당에 중화문명을 지켜낼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조선밖에 없다면서 화양구곡이라고 이름 짓고 구곡의 큰 바위에 명나라 황제와 조선 국왕의 어제(御製) 글씨를 새겨 화양동구곡을 황하문명의 성지(聖地)로 만들고 자 했다.

 

명나라는 쇠퇴하고 청나라가 일어서면서 청은 명나라를 치기 전 조선을 두 번 침략(정묘호란, 병자호란)했다. 조선은 두 번의 전쟁에서 패전했으면서도 청을 오랑캐로 보고 인정하지 않고 비록 망했지만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은 명나라를 문명국으로 보고 따랐다. 이런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의 중심에는 우암이 있었다.

 

화양동구곡은 우암이 바라는 것과 달리 황화문명의 성지가 되지 못했고, 또한 지금에 와서 보면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은 옳았다고 할 수 없다. 중국은 청나라가 300여년 지배했으나 서구 열강의 세력에 국력은 약해지고 1911년 멸망한다. 그 후 공산정권이 들어선다. 명이 망한 후 유학도 쇠퇴했다. 우리나라도 조선 말기에 나라는 쇠약해지고 일제의 침략을 받았다. 합리주의 서구근대사상이 들어오면서 유교는 보수적이고, 봉건적이고, 폐쇄적이라는 봉건사회의 유산으로 폄하되 왜곡되어 국력쇠퇴의 원인으로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최근 국력쇠퇴의 원인은 유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으며, 유학의 정신은 되살아나고 있다. 유교는 전통과 첨단의 조화(溫故知新), 인격완성과 인간관계의 완성(修己安人), 올바른 삶의 실천(知命行義)하며, 인의예지신을 밝혀 인간성 상실의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약으로 평가 받고 있다.

 

우암이 화양동구곡에 새긴 암각문은 시대에 떨어졌다고도 얼마간 했지만 이제 유교정신이 시대를 뛰어 넘는 인류의 보편적 사상으로 평가받으면서 화양구곡 유적도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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