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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화양동구곡 탐방기

by 仲林堂 김용헌 2017. 7. 21.


성균관 유교활성화사업단 주관 향교서원 전문가 양성교육 차 청주향교에 와서 2일차 일정 중 화양동구곡(華陽洞九曲)을 찾았다. 일행이 탄 버스는 충북자연학습원에서 하차했다. 이곳에 며칠 전 집중호우로 노도(怒濤)같은 물길이 쓸고 간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 성난 물길은 숨을 죽이며 흐르고 있었다.

 

장마 뒤끝 햇살은 뜨거웠으나 숲속으로 난 길은 그늘이다. 또 화양천을 따라 난 길은 넓고 평탄해서 여럿이 걸을 수 있으며 상류에서 하류로 가는 길이라 힘도 들지 않아 휠체어나 유모차를 끌고 가도 무난하다. 숲속에 품어내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하루 종일이라도 걷어도 좋을 듯하다.

 

이 길은 우암 송시열이 60세 되던 16668월부터 화양동에 계당(溪堂)을 짓고 거처를 시작하면서 그가 이곳을 떠나 회덕으로 돌아갔던 16864월까지 수 없이 걸었을 길이다. 우암과 그의 제자들은 구곡의 바위에 사유(思惟)하는 암각 글씨를 많이 남겼다. 이제 35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일행은 그 길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을 갖고 걷는다.

 

이곳은 원래 황양동(黃楊洞)이라고 불렀으나 우암이 이곳에 들어와 그 이름을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처 불렀다고 한다. ()는 중화를 뜻하고 양()은 양래복(陽來復)에서 따왔다. 구곡(九曲)은 중국 유학의 도통을 잇는 주자(朱子)가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처음 사용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율곡이 고산구곡에서 처음 사용했으며, 우암이 화양동에 구곡을 붙였다.

 

우암과 그의 문인은 중국의 명나라가 망해버린 마당에 중화문명을 지켜낼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조선밖에 없다면서 화양동과 화양구곡의 이름을 정하고 구곡의 큰 바위에 명나라 황제와 조선 국왕의 어제(御製) 글씨를 새겨 화양계곡이 중화문명의 성지(聖地)로 만들고 자 했다.

 

일행은 차로 화양구곡의 맨 끝에 있는 제9곡에 가까운 충북자연학습원 교차로에서 하차하여 크게 난 길을 따라 내려갔다. 파천쉼터 신작로에서 작은 길을 5분여 내려가자 제9() 파천(巴串)이다. 냇물은 평평한 바위를 넘는다. 그 모습이 용의 비늘이 꿰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하여 파천(巴串)이라고 한다. 큰 바위에 파천이라 암각이 있고, 둘레에 큰 바위에 이곳을 찾은 옛 묵객들의 이름 석자가 여기저기 보였다

 

파천에서 1km쯤 내려오면 제8() 학소대(鶴巢臺)를 만난다. 학소대는 학의 둥지가 튼 곳이라 하여 학소대이다. 소나무에 학이 노니는 선계(仙界)를 그려본다

 

신선이 놀음직한 학소대에서 조금 내려오면 제7() 와룡암(臥龍巖)이다. 계곡을 따라 누워있는 바위가 마치 용이 드러누운 모양이다.


와룡암에서 조금 내려오면 우측 산 아래에 우뚝 솟은 큰 바위 하나가 있다. 이 바위가 구름을 찌를 듯한 제7() 능운대(凌雲臺)라고 한다. 늠름한 선비의 모습과 같다.

능운대에서 조금 내려 와 다리를 건너면 산 중턱에 층층이 큰 바위가 있고 맨 위에 큰 바위 하나가 있으며 이 바위 위에서 별을 관측했다고 한다. 이 바위가 제5곡 첨성대(瞻星臺)이다. 첨성대 아래 큰 바위에 선조의 글씨인 萬折必東(만절필동)과 숙종의 글씨인 華陽書院(화양서원)이란 글씨가 있다고 하나 보지는 못하고 지나쳤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인 非禮不動(비례부동)과 우암의 글씨인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을 만난다고 한다.

 

비례부동은 공자의 제자 안연이 인을 이룰 수 있는 덕목이 무엇이냐고 여쭐 때 공자가 대답한 네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四勿)이다. 즉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말고(非禮勿廳),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非禮勿動)이다.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중국은 명이 망하고 청나라 오랑캐가 차지하고 있으니 조선이 중화라는 뜻이다.

 

첨성대에서 1km쯤 내려오면 제4() 우암이 계곡 건너편에 초가 3칸 집을 지었다고 한다. 우암이 죽은 후 암서재 편액이 걸렸다고 한다. 암서재 옆 직립한 바위에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이란 우암이 쓴 글자가 있다. 창오운단에서 창오는 순임금이 죽은 곳이다. 창오(蒼梧)에 구름이 끊어졌으니 더 이상 요문무주공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이 끊어졌음을 이야기하고, 그 끊어진 도통을 무이산에서 공부한 주자가 이었으나 이제 무이산도 비었다며 도통이 끊어졌음을 한탄한 말이다.

 

금사담에서 또 하나의 암벽에 새긴 큰 글씨는 명나라 태조가 쓴 충효절의(忠孝節義)이다.

 

암서재에서 조금 내려오면 제3() 읍궁암(泣弓巖)이다. 효종 기일에 우임이 통곡하던 바위이다.

 

읍궁앞 아래에 계곡 건너편에 큰 암벽이 있고 그 앞에 못이 있다. 이 못이 구름 그림자가 비춰 이름 붙인 제2곡 운영암(雲影巖)이다.

 

운영암에서 1km아래에 제1곡 경천벽이 있다. 하늘을 떠 받치고 있다하여 붙이 이름이다. 경천벽에는 우암이 쓴 화양동문(華陽洞門)이 있다하나 보지 못했다.



일행은 충북자연학습원에서 하차하여 9곡 파천으로 내려 가고 있다.   

바위에 암각한 파천(파천) 글자다.


바위 위로 흐르는 물이 고기 비늘을 뀌어 놓은 것 같다하여 파천이다.


파천 바로 옆에 있는 버섯모양의 바위에 시인 묵객들이 암각한 많은 이름자가 보인다.


파천으로 내려 갔다 올라오면 거북바위가 맞이하고 있다.


학소대이다. 학이 둥지를 틀고 있다하여 학소대이다.


용이 눠있는 바위라고 하여 와룡암이다.


바위가 구름을 찌른다고 하여 능운대이다.


별을 보는 첨성대이다.


우암 송시열이 살았다고 하는 암서재이다.


우암이 효종이 돌아가신 날(5월 4일) 통곡하고 절했다는 바위가 읍궁암이다. 이 사진에서 음궁암 바로 우측편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

 

명나라 태조(고황제)가 쓴 충효절의라고 쓴 글자를 바위에 암각했다.

 

수만년 물길이 만든 조각품이 지상으로 올라 와 오가는 이들의 눈 요기를 해준다.

화양천으로 따라 느티나무가 옛 정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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