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남한산성 무망루(2009년 5월 27일)

by 仲林堂 김용헌 2017. 7. 9.

우리 역사 중에서 가장 치욕의 시기는 조선 중기의 후금의 침입으로 항복하였던 병자호란과 일본에 의하여 합병되었던 왜정시대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 7년간 나라가 쑥대밭으로 되었지만, 의병이 일어섰고 이순신이란 성웅이 나타나 결국은 승전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임금이 청태종에 항전을 하다가 항복한 치욕의 역사이다.


광해군은 새로 일어서는 후금 세력과 은밀하게 우호관계를 맺었으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고, 인조가 들어서면서 명나라에 친하고 후금에 배척하려는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은 1632년 3만의 대군으로 침입하여 겨우 강화조약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국제정세를 잘 모르고 중화사상을 중시하며 명분만 쫒던 서인세력은 후금을 배척하여 자초한 난리가 병자호란이다. 후금은 청으로 나라 이름을 조선을 항복시켰으며, 명나라까지 치고 청나라를 세웠다.


 남한산성은 1626년부터 2년만에 축성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30만대군이 침입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1만2천의 조선군은 45일간 항전하였으나 식량 부족으로 항복하게 되었다. 산성으로 수원화성이나 서울의 숭례문에 비하여 보잘 것이 없으나 적의 침입으로 막기에 충분한 성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높지 않은 성의 담이 보인다. 이 정도의 성으로도 30만 대군의 침입에도 함락되지 않았다니, 그런 대로 잘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 담의 내부는 흙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지 못했다.


성밖으로 돌출하여 외적의 침입을 감시초소 역활을 하는 옹성이다. 여기 옹성 위에 오르면 남 서울이 다 보인다.


무당이란 잊지 말자는 뜻이다. 영조대왕께서 수어장대의 2층에 무망루란 판액을 걸게하였다. 수어장대 2층은 사람의 접근을 못하게 하여, 이 판액만 떼어 전각에 걸어 놓았다. 영조대왕은 인조의 청에 대한 항복, 그리고 효종의 북벌계획의 이루지 못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무망루란 판액을 내렸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을 방문하여 전각 옆에 보이는 전나무를 기념식수를 하였다. 전나무와 전각 사이에 "리승만대통령기념식수"라는 비석이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께서도 이 나무를 식수하면서 대한민국을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며 일제의 침약에 대하여 잊지 말자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수어장대"란 판액이 아주 크다. 수어장대란 지금으로 말하면 지휘소이다. 인조가 여기 머물며 엄동설한에 식량과 땔감은 떨어지는 극한의 상황에서 청에게 나라를 바치여하는 비극은 이루 말하지 못하였으리라.


남한산성을 축성하며, 억울하게 뇌물을 받은 험으로 처형당한 관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사당이다. 나라에 충성하거나 효의 표본이 되는 사람은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며 제사를 지내지고 있다. 여기 사당에 모신 분은 큰 벼슬을 하지 않았음에도 사당에 모시었다는 것은 비록 왕정시대이지만 임금이 얼마나 백성을 헤아렸다는 것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