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에서 흘러 내려 온 물줄기는 나주 고을 다시면 복암리에 이르러
사람 살기 좋은 옥토를 만들었네
우리의 한 선조는 일찍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으리라
인걸은 간곳이 없지만
복암리 고분은
확트인 넓은 대지에 야산과 같은 모습으로
그 영화를 아무도 모른채
700여년을 고이 서 있었다.
신라의 영화가 오늘도 빛을 발하고 있건만
여기 화려했던 금신발을 신은 주인공은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반남고분에서 나온
금관도 아직 주인을 모르네
또한
반남면 신촌리 고분은
고분 둘레에 도랑이 있어 일본의 고분과 같다하니
일본과 교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왕국일거라고 할 수 있건만
이 땅의 잃어버린 왕국은 아직도 찾을 길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여기 복암리 고분 중 가장 큰 고분이다. 부여 능산리 왕릉보다 커 보였다.
복암리 고분군은 회진마을앞 영산강변에 형성된 대형고분으로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복합묘제 고분이다. 복암리 고분군은 들판 한가운 있으며, 고분인줄 모르고 가문의 선산으로 알았다. 그 이유로 도굴의 손길을 피했던 행운의 고분이다. '96 ~ '98년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3호분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석실안에 옹관이 들어있는 독특한 묘제가 확인되었으며 1개의 봉분안에 옹관묘 22기, 수혈식석곽묘 3기, 횡혈식석실묘 11기, 횡구식석실묘 2기, 횡구식석곽묘 1기, 석곽옹관묘1기, 목관묘1기 등 총 7종류의 묘제에 41기의 유구가 확인된 우리나라 최초의 복합묘제 고분이다. 이러한 발굴 성과는 영산강 유역세력과 백제, 일본과의 관계규명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보이며, 각 묘제간의 관계 및 옹관묘 ,석실분 자체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 표본적 자료제공과 매장방법 및 부장유물 연구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고분은 3 ∼ 7세기까지 400여년간 사용된 고분으로 특히 96석실, 5호, 7호석실은 이 고분의 유력자 무덤으로 판단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신발, 각종마구류, 은장삼엽환두대도, 철제관모, 은제관식, 규두대도등 300여점이다. 나주시에서는 이번 발굴조사로 밝혀진 영산강유역 고대 문화상을 보여주는 고분전시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고분 위에 오르자 봉분이 아니고 평지였다. 이런 형태는 신라와 백제의 봉분식 능과 달랐다.
고분 위에 올라 바라 본 나주 평야다.
서쪽으로 바라 본 모습
북동쪽으로 바라 본 고분
북쪽으로 바라 본 고분
서쪽으로 흐르던 강물은 좌측 건물이 보이는 구진포에서 남쪽으로 돌아 나온다. 구진포의 옛 영화는 흔적도 없고 지금은 장어구이촌으로 유명하다.
영산강은 역사의 현장을 다 지켜 봤을 테지만 오늘도 말 없이 흐른다. 좌측으로 난 길을 2-3km가면 복암리 고분군이 나타난다.
일본을 오고 갔을 돗단배는 역사 속에서나 찾을 수 있을 가 지금은 장어잡이 나룻배 한 척만이 보인다.
영산강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곳에 1520년 지은 영모정이 있고 그 앞에 300년된 보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을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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