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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킴(지정 미지정)

지지대(遲遲臺)

by 仲林堂 김용헌 2017. 5. 29.

정면에서 본 지지대비와 비각  

 

지지대(遲遲臺) 고개

 

정조가 현륭원 참배하러 갈 때 아버지의 묘가 내려다보이는 지지대 고개에 도착해서 현륭원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더디다면서 "왜 이리 더 딘가" 한탄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후 임금의 행차가 늦어지는 곳이라 하여, 느릴 지()자를 두 번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고 있다.

 

지지(遲遲)라는 글은 맹자 만장장구하에서 "孔子之去齊 接淅而行 去魯 曰 遲遲(노나라를 떠날 때 ‘느리고 느리도다, 나의 걸음걸이)"라 나온다. 공자께서도 부모의 나라를 떠날 때  어쩔 수 없이 떠났으며, 정조도 부모가 계신 수원 땅을 더디게 차마 떠났던 것이다. 

 

이 고개는 수원에서 서울 가는 길목 중 맨 먼저 만나게 된다. 수원시와 의왕시 경계 지점으로 경수대로가 지나고, 이 도로의 서쪽 편에 지지대비와 비각이 있다. 지금은 도로가 여러 곳으로 뚫려 서울 가는 길이 많지만 예전에는 이 고개를 넘어야 서울 갈 수 있었다. 차가 흔한 요즘은 걸어서 갈 일도 없으니 차로만 넘다보니 휙- 지나 버리고 만다. 나도 수원에서 살은 지 40년이 넘었지만 가보지 못했다. 그러던 차 지난 525일 수원향교 명륜대학 수강생들과 같이 성균관 봉심하고 서울대공원에 들린 후 버스는 지지대고개쉼터에서 30분간 정차했다. 그 틈에 휴게소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지지대비가 있는 곳을 찾았다.

 

먼저 수원시라고 쓴 큰 석탑이 의왕시와 경계지점에 경수대로변에 보였다. 그 옆에 고개를 쳐들어 살피니 가파른 돌계단이 있고, 그 위에 비각의 지붕이 보였다. 돌계단에 음각한글자가 보였다. 돌계단 옆에는 大小人員皆下馬라고 쓴 하마비가 있었다. 하마비는 총탄의 상흔이 있었다.

 

돌계단을 오르니 지지대비각은 숲속에 싸여 있다. 이 비도 6.25의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총탄 자욱이 여기 저기 있다. 차만 오고 가고 인적이 드물었지만 비각 속에 비는 온전히 잘 보존되고 있었다. 비각 창틀 사이로 휴대폰을 집어넣어 간신히 비석을 촬영했다.

 

지지대비는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서영보(徐榮輔)가 찬()하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水原府留守兼總理使) 홍명호(洪明浩)가 비의 상단 전자(篆字)를 썼다.

 

비문의 내용 중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 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시어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가 있다.

 

이곳은 화평시대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곳이었지만 난리가 났을 때는 이곳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로 알려졌다. 6.25때 프랑스군참전비가 길 건너편에 있다. 여기서부터 오산 세마대까지는 방어할 수 있는 지형지물이 없다. 이 고개를 잃게 되면 오산 세마대까지 그냥 밀리게 되는 것이다. 세상사도 늘 평지만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이런 지겨운 고개도 있다어떤 고개를 잘 넘으면 일이 순순히 풀리기도 한다. 이와 달리 어려운 고개를 넘지 못하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있다.

 

지지대비는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수원의 관문에 서 정조임금의 효심을 영원토록 후세에 전하고 있다.

 

 

 

뒷면에서 본 지지대비

 

 

하마비이다. 임금이 머문 곳이라하여 여기를 지나는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리라고 하는 비이다.

 

 

우에서 좌로 쓴 臺二遲 글자이다. 여기서 二 표시는 앞자와 같은 글자라는 표시이다.

 

 

보도에서 본 지지대비이다.

 

 

현위치는 지지대쉼터이다. 지디대쉼터에서 지지대비가 있는 곳까지는 위로 약 100m올라가야 한다.

 

 

 

지지대비 전면이다.

 

지지대비 후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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