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팔달문(남무)에서 성곽을 따라 팔달산에 오르는 중턱에 홍난파의 '고향의봄' 노래비가 있다. 홍난파(1898-1941)는 본명이 홍성우이고, 난파는 호이다. 그는 1898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나 그 다음 해 서울로 이사 갔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에는 남양군이었고, 그 후 수원군으로 변했고, 지금은 화성시에 속한다. 이 노래비를 세울 때는 남양 활초리가 수원시에 속해 있어 수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팔달산에 노래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살았던 서울 종로구 송파동 집은 등록문화재로 제9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아담한 노래비이다.
꽃 문양 둘레 속에 동판으로 홍난파의 인물조각을 넣었다. 50년 전 조각품으로 우수하다.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감옥에 72일간 옥고를 치르면서 사상전향 논문을 내고 친일활동을 했다.
노래비를 세운사람들은 경기도지사를 비롯한 당시 수원의 주요 인사들이다.
서울 종로구 송파동에 있는 홍난파 가옥이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 2번지 16호이다.
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다는 간판이다.
홍난파노래비를 어제 5월 19일 다시 찾았을 때 동판 얼굴이 없어졌다. 동판이 없어진 것은 누군가에 훼손된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그가 친일활동을 했다는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 가 생각한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이름이 등재되어 언론에 보도되었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친일행위자로 비난을 받았다.
그의 친일 관련 사실은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홍난파는 춘원 이광수가 조직한 수양동맹회와 도산 안창호의 친목모임인 동우구락부가 통합되어 탄생한 수양동우회의 회원이었다. 그가 이 단체의 회원으로 계몽운동을 벌렸다는 이유로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181명 지식인을 검거했다. 홍난파도 붙잡혀 종로 경찰서에서 72일간 고문을 받았다. 모진 고문 끝에 사상전향서를 작성했다. 본심이 아니라 강압에 의해 전향서를 서명했던 것이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 늑막염이 재발했고 2년 후에 사망했다.
옥고를 치른 후 친일행적으로 군가와 친일 가요 작곡, 경성중앙방송 관현악단 지휘, 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 무놔위원 활동 등이었다. 그러나 홍난파 친일에 대하여는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2009년 11월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홍난파를 포함 1006명이 됐다. 이에 홍난파 가족은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홍난파를 제외한 1005명의 이름이 담긴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보고서가 발간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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