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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킴(지정 미지정)

축만제(서호) 제방에 세운 '전 주사 박문회 송덕비'

by 仲林堂 김용헌 2018. 4. 2.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에 서호는 지금은 공원이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 농업의 산실인 농촌진흥청 농사시험 연구에 사용하는 물을 대는 저수지였다. 남쪽으로 저수지 제방이 있다. 제방의 동쪽 끝에 물을 빼는 옛 수문이 저수지 안쪽에 있고, 다른 하나의 수문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제방 끝 매몰된 곳에 있다. 물을 정화시키는 큰 건물 동쪽에 있고, 이 건물 동쪽에 철조망으로 둘러 싸인 "서호지(西湖池)"라는 작은 건물이 있고, 그 앞에 비석 하나가 있다. 비문은 아래와 같다. 

 

破坰改築 屯民安堵

前主事 朴文會 頌德碑

廢壓復完 公稅適當 

 

이 비문은 전 주사인 박문회라는 분을 칭송하는 송덕비이다. 제방이 파괴되자 새로 쌓았다 破坰改築(파경개축)이 있고, 수압이 있어 제방이 무너지는 위기가 있었으나 복원했다 廢壓復完(폐압복원)는 글로 보아 이 분이 있어 큰 장마로 제방이 무너지는 위기가 있었으나 온전히 보전했다고 짐작이 간다. 

파경개축(破坰改築) 구민안도("屯民安堵)는 "제방이 파괴되자 다시 쌓아 서둔동 사람은 모두 안도하게 했다"로 풀이할 수 있다. 廢壓復完 다음에는 公稅適當은 세금을 공평하게 매겨 무엇을 적합하게 했다는 뜻이다.   

 

정조는 팔달산에 화성을 1796년 세우고 친위부대 장용영을 만들었다. 이 부대는 50명으로 시작하여 점점 증가하여 2만명까지 달했다. 이들 군사 양식을 위하여 둔전(屯田)을 조성했고, 이 둔전에 물을 대려고 저수지를 만들었다. 하나는 1795년 수원화성 북쪽에 만석거(萬石渠)를 만들었고, 다른 하나가서쪽에 축만제(祝萬堤)이다. 이 축만제는 1799년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별칭이 서호(西湖)이고, 지금은 서호공원이라고 부리고 있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고, 수리시설이 되어 있는 축만제 일원에 권업모범장이라는 농사연구시설을 세웠다. 그 이후 이곳은 우리나라 농업의 산실으로 역활을 해왔다. 이곳 만석거 아래 농지는 우리나라 벼 농사의 연구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벼 품종이 만들고, 농사법이 개발되었다. 당시에는  농업국가로서 만석거는 중요한 수리 시설이었다.

 

 

破坰改築 다음에 글자가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廢壓復完도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폐압복원 다음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구민안제(救民安諸) 같다.

글씨가 뚜렷하게 보인다.

 

 

 

 

 

 

하얀 건물에는 서호지라는 글씨가 있고, 그 앞 우측편에 송덕비가 있다.

 

 

이 건물 안에는 수문을 조작하는 기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문을 올리고 닫고 하는 수문이다. 건물 안쪽에는 이 수문을 돌리는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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