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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킴(지정 미지정)

충양공(忠襄公) 김준룡(金俊龍) 승전기(勝戰記)

by 仲林堂 김용헌 2013. 12. 25.

 

충양공(忠襄公) 김준룡(金俊龍) 승전기(勝戰記)

수원에는 자랑거리 중 하나가 산에 오르기 좋은 광교산이 있는 것이다. 광교산은 대도시에 있어 수많은 등산객이 오르고 있다. 경기대 입구에서 출발하여 형제봉을 지나고 비로봉을 통과하고, 최고봉인 582m 시루봉까지 오른다. 하산은 온 길을 돌아 올 수도 있고 절약수터지나 광교버스 종점까지 온다.

광교산에 오면 또 하나 꼭 보고 가야할 곳이 하나 있다. 비로봉 바로 앞 ...
등산로에서 70m지점에 있는 김준룡장군 전승지(戰勝地)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모르고 지난다. 김준용 장군은 누구와 언제 어떻게 싸웠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 같다.

명나라를 누르고 새로 일어선 청나라는 조선을 1636년 침입하였다. 당시 인조 임금은 본래 강화도로 피신하려다가 늦어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청군이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조선은 어렵게 방어를 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급히 각도 감사(지금의 도지사)와 병사(도 육군 최고책임자)에게 남한산성으로 군사를 이끌고 오라고 명했다.

전라도 감사 이시방과 전라 병사 김준룡은 군사 6,000명을 이끌고 1636년 12월27일 남한산성으로 향하여 1637년 1월1일 충청도 직산에 도착했고, 1월2일 경기도 양지에 도착하였다. 1월4일 김준룡장군은 선봉장으로 군사 2,000명을 이끌고 광교산 비로봉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에 적군인 청나라 양굴리는 충청도 병사를 물리치고 나서 1월5일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광교산으로 들어와 김준룡장군과 맞섰다. 그날 온 종일 전투에서 청군은 물러났다. 그 후 2번 공격을 하였으나 적장인 양굴리는 고창출신 박의가 쏜 포에 맞아 즉사하였다. 양굴리는 청태종 누루하치의 사위로 후금을 세울 때 탁월한 전공을 세운자이다. 이원익이 쓴 동사약(東史約)에는 3번의 전투 다 이기고 피로 골자기가 물들었으며, 적장 8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교산 전투는 청과의 3개월간 전쟁 중서 첫 승리이며, 유림(柳琳) 장군의 금화전투에서 승리와 함께 단 2곳밖에 없는 조선의 최면을 세운 매우 값진 승리였다.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장군은 화살과 양식이 떨어져 다시 싸우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수원으로 나왔다. 그 때가 밤중으로 행군 중 정변이 일어나면 우리는 죽는다며 소란을 일어나며 많은 군사들이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김준용장군 군사가 수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패전한 것으로 오인하고 이시방 감사는 군사를 공주까지 후퇴시킨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전라군사의 승전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전라군사가 남한산성으로 언제 오나 목이 메도록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남한산성으로 오지 않았다고 조정에서는 이시방과 김준룡 장군에 죄를 물었다. 김준룡장군은 2월11일 유배를 갔다. 그 후 김준룡장군은 승전이 참작되어 유배에서 풀려났고 후에 김해부사, 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조 때에 국운이 오르면서 김준룡장군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되었다. 정조대왕은 김준용장군에게 충양(충양)이란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으로 증직하였다. 수원성을 축성할 때 수원부사인 채재공은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으로 보냈다. 그 때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이 그 곳에 사는 사람으로부터 그곳이 김준룡장군의 전승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채재공께서 이곳에  비문을 새겨 넣으라고 명했다고 한다. 이 비문은 1974년 처음으로 경향신문에서 보도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수천명의 우리 군사들이 청군과 맞서 싸워 이긴 이곳은 앞으로 조상의 불굴의 역사가 있는 곳으로 성역화를 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경사가 심한 큰 바위 중간에 비석모양으로 음각하고 글자를 다음과 같이 새겨 넣었다. 忠襄公金俊龍戰勝地(충양공 김준용장군의 승전지), 그 좌우에 勤王至此殺淸三大將(임금을 지성껏 섬겼고 청나라 3명의 대장을 죽었다. 丙子淸亂公提湖南兵(병자청난에 호남병사를 이끌고 왔다)라고 새겼다.

 

 

현위치는 김준룡장군 전승지 간판에서 50-50미터 올라온 지점으로 비로봉까지 94m 전방이다. 보통 등산객은 비로봉으로 올라 정상인 시루봉까지 갈 수 있으나 비로봉의 경사가 심하여 현위치에서 우측화살표시가 있는 지름길로 간다.

 

등산로에서 70m지점에 전승지가 있다는 안내판이다.

위 안내판 글 내용이 틀린게 많아 경기도청에 아래와 같이 수정해 줄 것을 민원으로 제안했습니다.

 

“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 안내판 수정을 다음 화살표시와 같이 요청합니다.

1.간판의 이름이 “및”라는 일본식 표현이 들어가 좋지 않습니다. 그냥 “비”로 표현하는 것보다 바위에 새겼으므로 암각비(岩刻碑)가 좋을 것 같습니다.

김준룡장군 전승지(戰勝地)와 암각비(巖刻碑)

2. “병자호란 때 광교산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쳤던 김준룡(1586-1642) 장군의 전승지에 비 모양으로 새긴 글이다.”에서 비 모양으로 새긴 글이라고 하여 어떤 연유인지 비가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곳은 1737년 1월5-7일 인조 병자호란 때 전라병사 김준용 장군이 우리나라를 침입한 청나라 양굴리 군사를 물리 친 곳으로 김장군의 승전 사실을 바위에 새긴 곳입니다.

3. “김준룡 장군은 원주김씨로 조선 광해군 원년(1609)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처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광교산에 이르렀다.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다음과 같이 수정을 건의합니다.

  →”김준룡 장군은 광해군 원년(1609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736년 인조임금이 피신하여 계신 남한산성으로 군사를 이끌고 오라는 명을 받고 1737년 1월4일 선봉장으로 군사 2,000명을 이끌고 광교산 비로봉에 진을 치자 이에 청군 양굴리는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청군양굴리는 3번을 공격했으나 패퇴하고 말았으며 고창출신 군사 박의가 쏜 포에 맞아 즉사하였다.

4. “그곳에서 격전을 벌린 끝에 청태종이 사위이며” 내용이 틀리고 격전을 벌린 끝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 보다는

  →“적장 양굴리는 청태조 누루하치의 사위로 후금 건국 시 여러 전투에서 큰 전공이 있는 자로"

5. 청태종→청 태조

6. 적장 양고리등의 목을 베었다로 쓰였으나 적장의 이름은 양골리가 맞고 포탄에 맞아 죽었으므로 베었다는 틀립니다.

  양고리→양골리

  목을 베었다→ 포탄에 맞아 죽었다.

7. “세상을 떠난 후”--->1792년 9월29일

8. 영의정에 추증(돌아가시고 벼슬을 받으면 증직이라고 합니다).

   → 영의정에 증직

9. 충숙→ 충양

10. 시호도 붙어졌다(시호는 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는 이름으로 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 시호를 받았다.

11. “전하는 말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수정바랍니다.

  → “수원성을 축성할 때 수원부사인 채재공은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으로 보냈던 사람들로부터 김준룡장군의 승전 이야기를 듣고 비문을 새겨 넣으라고 명했다고 한다.”

 

 

 비로봉을 지나면 토끼재가 있다. 토끼재에서 50-60미터 오르니 비로봉이 보인다. 김준룡장군께서 이 봉오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청군과 싸웠던 곳이다. 봉우리가 원뿔모양으로 생겨 아래에서 올라오는 적군을 방어하기에는 아주 좋은 지형이었다. 비로봉의 위치가 경기대 입구에서 약4 m지점이되고 높이는 550미터 정도로 보인다. 등산객이 이 지점에 도착할 때가 가장 힘들어 하는 지점이다. 적군이 이 지점까지 왔을 때는 힘이 많이 떨어질 것으로 보고 이곳을 방어진지로 삼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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