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3일 서울 종로구 송월1길 44-11 선생의 옛 집터를 방문했다. 선생의 11대 손 이재능이 1958년 문성사를 짓고 사당을 모셨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선생께서 바위에 새긴 글씨 "성동인우(性同鱗羽) 愛止山壑(애지산학)"란 비문만 보고 나서 "고향의 봄" 노래를 작곡한 홍란파 선생의 고택을 방문했다. 그리고 경교장(京橋莊)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이에게 물으니 강북삼성병원으로 들어가면 있다고 하나 출입구에 경교장 안내 표시는 없었다. 코앞에서 다시 여쭈고서야 경교장을 찾았다.
율곡 이이 선생님은 조선시대 가장 훌륭한 인물 중 한 분이시며, 우리나라 유학 선현 중에서 퇴계 선생님과 함께 가장 존경하여야 할 인물이나 선생의 신주를 모셨던 문성묘(文成廟) 자리에는 구세군교회가 들어서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치 못했다. 경교장도 문성묘와 같이 사라질 위험이 있었다고 했다.
이 건물은 친일파 최창학이 1938년 일본인 고위관료를 위하여 지은 집이었다고 한다. 건물 내부는 일본식으로 다담이가 깔려있었다. 당시 일본식 최고급 호텔로 보였다. 최창학은 금광업으로 조선에서 3번 째가는 부자라고 했다. 그는 일본이 망하고 해방이 되고 김구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가 환국하자 자진하여 임시정부요인에게 쓰라고 했다. 그러나 김구선생이 암살당하고 나자 거액의 사용료를 김구선생의 유족에게 요구했으며, 결국 김구선생의 유족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경교장을 떠났다고 한다. 친일파 최창학은 일제의 앞잡이로 일제 때는 호위호가 했고, 일제가 망하자 임시정부가 권력을 잡을 것으로 알고 이 건물을 임시정부 요원에게 받쳤으나 김구선생이 돌아가시고 임정이 권력을 잡을 수 없게 되자 환수했던 것이다.
최창학은 환수한 이 건물을 중화민국대사관에게 제공했고, 바로 6.25가 터지고 미군이 사용했고, 종전 후 베트남대사관으로 사용했고, 최창학이 사후에 고려의료재단에 매각되어 병원원무과로 사용되었고, 다시 삼성의료재단에게 매각되었으나 경향신문 등 진보언론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노력으로 2001년 4월 6일 서울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5년 국가사적 제465호로 지정되어 묻힐 번했던 역사의 현장이 살아남게 되었다.
퇴계선생의 유적이 있는 문성묘는 한 개인의 잘 못으로 없어졌으나 유림의 소리는 없었으며 복원은 없었다. 한편 김구 선생의 유적이 있는 경교장은 사라질 위기도 있었으나 애국시민은 시민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서울시는 외면하지 않았고 살아남았다.
병원 건물이 포위하고 있는 것 같은 경교장이다. 겉은 서양식이고, 속은 일본식이다.
김구선생님이 암살당했을 때 입으셨던 혈흔이 묻어 있는 옷이다.
회의실이다.
백번선생께서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계셨고, 사진촬영방향에서 안두희는 4발의 총탄을 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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