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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광산김씨의 유명 세거지 (4)전남 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충효의 고장 “매곡마을”

by 仲林堂 김용헌 2015. 11. 10.

전남 무안군 해제면 양매리 충효의 고장 매곡마을

 

매곡마을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인 부평에서 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매죽헌 김득남의 후예가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마을이다. 매곡 마을에는 매죽헌공이 배향되어 있는 모충사(慕忠祠), 7명의 효자와 열녀가 있는 칠효열각(七孝烈閣), 삼강비(三綱碑), 충열문(忠烈門)이 있다. 모충사는 매죽헌의 9대조인 음촌 김약시(1359~?)가 주향(主享)이다. 현재의 건물은 1984년에 완전 개축한 것이다. 모충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서 사우(祠宇) 우측으로 매죽헌 김득남 유허비충정공 김약시 충절비가 있다. 부속 건물로는 매곡강당과 경헌사(敬獻舍)가 있다.

 

매죽헌 김득남 장군은 1591(선조 24)태어나 1637(인조 15) 순국하신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선술(先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고, 충의공(忠毅公) 시호를 받았다.

 

김득남(金得男)은 아버지 김억창(金億昌)과 어머니 의성김씨 사이에서 함평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신장이 매우 컸으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젊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서천포만호(舒川浦萬戶)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함녕군(咸寧君) 이항(李沆)을 따라 반정군에 가담하여 앞장서서 입궐하였다. 그는 옥새를 주어 그의 공으로 삼지 않고 그 공을 이항에게 돌렸다. 그는 그 공으로 사도첨사(蛇島僉使)에 제수되었다. 1635(인조 13) 형조의 절충(折衝)으로 있을 때, 화적인 민수이(閔守伊)를 잡아 공을 세웠다. 그가 한강의 철곶첨사(鐵串僉使)로 있을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강화도에 청나라 군사가 침입하였다. 그는 한양에서 강화도로 통하는 길목인 부평(富平)에서 청군이 민간인을 포로로 잡아가자, 그들을 탈환할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자원하는 군사가 없었으나 그는 홀로 자원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당시 대군으로 있던 효종이 그에게 백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 그는 양정(梁挺)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나와 부평 근처에서 적에게 항전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하였고,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되며 순절한 강도순절인(江都殉節人)으로 화충렬사(江華忠烈祠)에 배향 되었다. 그의 아들인 김방보(金邦寶) 역시 무장으로 난포만호(蘭浦萬戶)를 역임하였다.

충의공의 의로운 정신은 자손에 이어져 아들 김방보, 5세손 김성흡, 6세손 김육정, 7세손 김재문과 김재철, 8세손 김종현이 정려(旌閭)를 받아 7명의 효자가 나왔고, 충의공의 6세 손부(孫婦) 양성이씨와 9세 손부(孫婦) 진주정씨는 열녀로 정려를 받으니 가히 충절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충의공의 후손 중 金鏞洙(김용수) 선생(1865-1940)의 자는 진성(振聲)이고 호는 잠와(潛窩)이다. 선생은 경숙국치(1910)나라가 망하자 애통해하며 지은 시가 전해 지고 있다. 잠와 선생은 후진양성에 힘을 썼다.

이 마을 출신으로 항일 의병장 김익수(金益洙, 1880-1920)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에 오르신 김정규의 손자로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문인으로 공이 25세가 되던 해인 1905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공은 문종식 등 88인과 함께 11월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충청도 청양군 정산에서 1906년 의병을 모으자 전국에서 그 수가 500여명에 이르렀다. 공은 병사를 주야로 훈련시키고 2월 중순에 부여군 일대와 보령군 남포에 입성하여 완전 무장한 후 남포 새재에서 왜군과 접전하여 대승을 거뒀다. 4월에는 의병수가 수 천명에 이르렀다. 정예 왜군의 습격을 받아 분전했으나 수적 열세로 분패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굴하지 않고 다시 익산에서 의병 수 백명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여러 차례 왜군을 사살하였다. 1909년 안주군과 익산군 어름에서 왜군에 잡혔으나 압송 중 탈주하면서 왜군 2명을 살해하였다. 그 해 9월 왜군 2500명이 소위 조선폭도 대토벌 작전에 맞서 항전했으나 중과부족이었다. 그 후에도 전남 서남 도서지방으로 다니면서 항전했으나 전남 대야(大夜: 사창방에서 15)에서 붙잡혀 10년 징역형을 받고 수감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192011140세에 타계하였다. 공은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 외에 매곡마을에 효자 김판수(1874-1925)기적비(金判洙記蹟碑)와 효행과 학문이 높았던 후매 김용백(金容佰)을 기리는 後梅居士 金公敎思碑가 있다.

매곡 마을은 광산김씨의 자랑스러운 충효마을로 2012(사단법인) 매죽헌 김선생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모충사를 중심으로 매죽헌 선생 기념관건립과 생가복원 그리고 충열문, 칠효열각, 삼강비 등의 유적유물을 활용하여 충효정신을 배우는 역사문화마을을 만들고자 현재 삼강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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