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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광산김씨의 유명세거지 (1)장성 황룡(黃龍)마을

by 仲林堂 김용헌 2015. 11. 10.

장성 황룡(黃龍)마을

 

황룡마을은 전남 장성읍에서 약 8km 떨어진 황용면 내황길 69번길에 있다. 황룡(黃龍)이란 군주(君主)가 나올만한 지명이다. 그런 유래가 없다지만 근래 국무총리와 3선 국회의원이 나왔고, 이 작은 마을에서 박사 25명을 배출했다니 범상치 않다. 이 마을은 광산김씨의 세거지(世居地)로 많은 훌륭한 광산김씨 인물이 나와 전남지역 사람들은 이곳 출신 광산김씨를 높게 칭하여 황룡김씨라고 부르고 있다.

 

광산김씨가 이 마을에 처음 발을 들인 이는 조선 중종 때 김숭조(金崇祖, 22)이다. 그는 1480(성종 11) 진사가 되고 1495(연산군 1) 식년문과에 을과로 과거에 합격하여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가 되고, 이어서 1501년 정언(正言), 1504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사간원과 사헌부의 요직을 맡아 조광조의 개혁 정치에 동참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사림(士林)에 피바람이 몰아치자 스스로 낙향을 결심한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 아래에서 벼슬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청맹(靑盲)’이라 일컫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

 

원래 황룡마을은 여양 진씨(驪陽 陳氏)의 집성촌(集成村)이었으나 김승조의 4남 김기(金紀)가 황룡에 사는 진삼의 딸과 결혼하여 김승조가 이곳을 찾게 되었다. 김기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舍人)이었다. 김기의 아들 김경우(金景愚, 15171559)는 공조좌랑이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요월정(邀月亭)을 지였다. 18111차 중건 하였으며 1925년 후손 김계두가 중건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김인후, 기대승, 양응정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다. 이들이 이곳에서 읊었던 시는 현판에 새겨져 있다.

 

일화에 의하면 김경우의 후손 김경찬(1796~1879)이 요월정의 경치를 두고 조선 제일 황룡리이라 큰 소리쳤다가, 고종 임금이 한양을 능멸했다며 조선 제일이 황룡이면 한양은 무엇인가?”말하자 천하제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임금이 이런 미꾸라지 같은 놈 봐라.’ “그럼 천자가 계시는 장안은 무엇인가?” 말하자 당연히 만고(萬古) 제일입니다.”라고 재치 있게 답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 때는 요월정 앞으로 황룡강이 지났다고 하나 농지를 만들려 물길을 돌려 지금은 황용강을 볼 수는 없다.

 

이 마을은 이름에 걸맞게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첫째가 김황식 전 총리 가문이다. 김 전총리 가문은 14세 문숙공파, 16세 삼사좌사공파, 22세 사간공파, 26세 송백당공파에 속한다. 전 김총리의 아버지 김원만씨는 장성향교의 전교를 지냈고, 금성 나씨 사이에 43녀를 두었다. 1남은 의사, 2남은 농촌진흥청 차장, 3남은 민선 1~3기 장성군수, 그리고 4남은 국무총리이다. 1녀는 교사, 2녀는 일진그룹 회장의 처, 3녀는 동신대학교 총장이니 최고 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마을 출신인 김종식씨는 김황식 전총리와 재종간으로 현재 장성군 광산김씨종친회장을 맡고 있다.

 

이 마을에는 또 하나의 큰 가문이 있다. 김영하씨 가문이다. 그는 26세 송백당공파의 큰 형 직장공파에 속한다. 그는 연희전문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이 마을에 형설학원을 설립하여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덕을 쌓았다며 칭송하고 있다. 그는 목포시장을 역임하였고 조병옥박사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의 조카가 서울 강서구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효석씨이다. 김효석씨는 서울대학교를 나와 행정고시에 합격하였고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3선 경력의 국회의원으로 이번 선거에 비록 낙선했지만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는 등 경제 전문가이며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정치인이다.

 

황룡마을의 또 하나의 자랑은 광산김씨 5대파 중 2번째 대파인 문숙공파 종회각(文肅公派 宗會閣)이다. 이 건물은 문숙공 후손이 화목하고 단결하여 추원보본(追遠報本)과 윤갑을 준수할 목적으로 1983년 요월정 우측에 건립한 건물이다. 그 때 문숙공파 종회를 여기서 창립하였다. 전면 4, 측면 4간의 8작 지붕 한옥 구조로 건립하였다. 이곳에서 매년 5월에 종원(宗員) 천 여명이 참석 총회를 갖는다.

황룡마을에도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많이 떠나 광산김씨 60여 호가 지금은 40여 호로 줄었지만 큰 인물을 배출한 마을로 자긍심으로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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