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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광산김씨의 유명세거지 (3)수많은 보물을 간직한 안동 “군자(君子)마을”

by 仲林堂 김용헌 2015. 11. 10.

수많은 보물을 간직한 안동 군자(君子)마을

 

이 마을은 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132번지 낙동강변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그 지역이 수몰 예정지라서 지금 장소 오천리1리 산28-1358번지로 옛 건물을 이전하였다. 이전 할 때 건물의 대들보에 보관된 수많은 보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때 발견된 고서, 고문서 등 유물은 군자마을에 자체 보관하고 있다가 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기탁한 5000여 점의 유물 가운데 국가지정 보물이 20490점에 이른다. 이들 고문서들은 고려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자료들로서 고문서 연구 및 당시의 정치·경제·사회·가족제도 등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사료로서 귀중한 자료로 알려졌다.

 

광산김씨가 안동 군자마을에 살게 된 내력과 군자마을로 불리게 된 경위는 아래와 같다. 군자마을광산김씨 예안파는 고려 충숙왕때 밀직부사 김천리(金天利)의 아들 제용소감(濟用少監) 김무(金務)가 경기 고양(高陽)에서 안동(:남선면 노림)으로 내려 오면서 시작되었다. 김무(金務)3(坦之, 崇之, 孝之) 2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 김숭지(金崇之)와 그 손자 음성현감 김회(金淮)는 풍천 도양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편 이보다 앞서 김무(金務)의 셋째 아들 김효지(金孝之)가 황재(黃載)의 사위가 되어 오천면 외내 마을에서 살게 되었는데 김효지(金孝之)에게는 아들이 없어 조카인 김간(金澗)을 입양하였다. 그러나 김간(金澗) 역시 아들이 없어서 형 김회(金淮)의 아들인 조카 김효로(金孝盧)가 풍천 도양에서 이거하여 김간(金澗)을 대양(侍養)하게 됨으로써 외내의 입향조가 되었다. 예안파 입향조 김효로는 안동 입향조 김무(金務)의 증손자가 된다.

 

외내 마을은 입향조 김효로의 손자 후조당 김부필(金富弼), 읍청정 김부의(金富儀),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 김부신(金富信), 설월당 김부륜(金富倫) 5종형제가 퇴계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과 행의가 사류의 추앙을 받게 되었고, 고종인 일휴당 금응협과 면진재 금응훈 등과 같은 동리에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니 예학의 대가인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외내 마을에 와서 보고 외내에는 7군자가 있다하여 유명하여 졌다. 이것이 연유가 되어 군자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7군자 외에도 김효로의 증손항렬에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구봉(九峰), 김전(金㙉), 北崖 김기(金圻), 계암(溪巖) 김영(金坽)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출처: 예안김씨인터넷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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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에 있는 주요 건물을 보면 김해(金垓)를 제향하는 사당(祠堂)과 후조당에 부속된 재사(齋舍)가 있다. 당초 김효로의 사후 2년 뒤인 1536(중종 31) 후손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세우고 제향해 오던 중, 1592(선조 25) 임진왜란 시 영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한 김해를 추향하여 영구토록 봉향하고 있다. 그 외 지정된 건물은 재사 2, 고사(庫舍) 1, 사당 1동이며, 일곽내에는 후조당(後彫堂, 중요민속자료 제227탁청정(濯淸亭, 중요민속자료 제226) 종가(宗家,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침락정(枕洛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 등이 있다.

군자마을에는 학문에 뛰어난 문순공 김부필(金富弼) 등 수많은 군자가 배출되었지만 그 중에서 두 사람을 뽑는 다면 김효로의 증손자인 예문관 검열공이며 의병장인 김해(金垓)와 문정공 김영(金坽)이라고 할 수 있다.

 

검열공 김해(金垓, 1555-1593)은 호는 근시재(近始齋시재(始齋). 김효로(金孝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김연(金緣)이고, 아버지는 부의(金富儀)이며, 어머니는 권습(權習)의 딸이다. 공은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고 조신(朝臣)의 천거로 1588(선조 2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9년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으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지내고, 한림(翰林)에 선발되어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그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11월 사국(史局)에서 사초(史草)를 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 예안(禮安)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안동·군위 등지에서 분전하였다. 이듬해 3월 좌도병마사 권응수(權應銖)와 합세하여 상주당교(唐橋)의 적을 쳐서 큰 전과를 거두고, 4월 서울에서 부산으로 철수하는 적을 차단, 공격하여 대승하였으며, 5월에는 양산을 거쳐 경주에서 이광휘(李光輝)와 합세하여 싸우다가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1595년 홍문관수찬이 증직되고, 1893년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근시재집이 있다.

 

문정공 김영(金坽, 1577-1641)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 예안 출신. 효노(孝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이고, 아버지는 현감 부륜(富倫)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부호군(副護軍) 수민(壽民)의 딸이다.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로 유성룡(柳成龍)의 막하로 자진 종군했으며, 당시 명나라의 총병사 오유충(吳維忠)과 유격장 노득공(盧得功) 두 사람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정도로 학식이 숙성하였다. 그 뒤 1612(광해군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주서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관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두문불출 독서로 나날을 보내었다.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인조를 찾아 나섰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김요형(金耀亨)을 시켜 소를 올리게 하고서 돌아왔다. 뒤에 신하로서 아들을 시켜 상소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났다는 격렬한 상소가 있었으나 인조가 이를 모두 무마시켰다. 그 뒤로도 학덕을 잊지 못한 인조가 장령·보덕·헌납·사간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번번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병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했으며,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 시 몇 편을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나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마음을 달래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마지막 20여 년 간은 문 밖 출입을 삼가며 오가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내니 사람들은 세상에서 영남의 제1인이라고 불렀다. 1689(숙종 15)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는 원액(院額)이 하사되었다. 저서로는 계암집(溪巖集)6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근래부터 군자마을은 고택체험마을로 이용하고 있다. 아래 주소에 들어가면 안동 군자마을에서 체험을 할 수 있다.

http://www.gunjari.net/gunj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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