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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광산김씨의 유명 묘역 (1) 송곡(松谷) 광성군(光城君)이 잠든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

by 仲林堂 김용헌 2015. 11. 10.

송곡(松谷) 광성군(光城君)이 잠든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

 

왕대밭에 왕대가 난다는 말이 있다. 우리 광산김씨 가문에도 왕대가 나오는 집안이 있다. 고려조에 18세 광성군 김계지(金繼志) 가문이 그렇다. 광성군은 병판과 판의금이었으며 그의 아들 5형제 모두 현달하였다. 큰 아들 김재(金滓)는 광산군 이조판서, 둘째 아들 김심(金瀋)은 호조판서, 셋째 아들 김회(金澮)는 한성판윤, 넷째 아들 김연(金演)은 형조판서, 다섯째 아들 김침(金沈)은 호조참판, 막내 여섯째아들 김혼(金渾)은 병조판서였다.

 

광성군이 출생지는 모르나 그가 잠든 곳은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이다. 이곳에는 정부인 남원양씨 묘도 같이 있고, 신도비도 있다. 그의 호에 걸맞게 소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공은 1410년 돌아가셨으니 지금으로부터 올해로 605년 전이라, 그 후부터 잊지 않고 사모하고 있으니 자손은 영원히 사모하고 있다고 하겠다. 광성군의 둘째 아들 김심(金瀋)의 묘도 아버지 묘와 함께 무성리 원촌에 있다.

 

광성군 김계지는 본래 이름은 김형(金逈)이었으나 임금의 뜻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김계지란 이름을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았다고 한다. 호는 송곡(松谷)이다. 무예에 능하였고, 태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경외(京外)의 군정에 기여한 바 많았다.

 

광성군은 1403(태종 3) 상호군으로서 경상·전라·충청도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병선을 점검하고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근무상황을 규찰하였다. 같은 해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난을 일으키자 안변에 파견되어 교서를 반포하고 민심을 위무하였다. 1406년 좌군총제(左軍摠制) 재직 중 조사의의 난 평정에 기여한 공으로 군공 1등에 등제되면서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고, 곧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 1407년 삼군총제서로 명나라에 말을 받치기 위한 진헌관마색(進獻官馬色)이 설치되면서 그 책임도 겸하였다. 1408년 전라도도절제사 때에 천거한 만호 박광계(朴光桂허승량(許承亮)이 탐관오리로 죄를 받게 되자 천거의 책임을 추궁당한 뒤 면직되었다. 그러나 곧 풍해도(지금의 황해도) 병마도절제사 겸 판해주목사에 기용되었고, 1409년 전렵군(田獵軍)의 수를 가정(加定)하고 자제패(子弟牌)를 만든 뒤 이들의 부방(赴防)을 면제하게 한 일로 다시 면직되었다. 그 전국에 걸친 11도병마도절제사의 설치와 함께 다시 강원도병마도절제사에 기용되었으며, 1410년에 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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