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이 탄 차는 금강교로 들어서며 속도를 줄인다. 이 다리는 1932년 충청남도 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보상 물로 세워져 1986년 공주대교가 건설되기 이전까지 공주에서 금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라고 한다. 노폭이 좁아 작은 차만 지날 수 있고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만 갈 수 있는 일방통행로이다. 그 반대편은 인도와 자전거 도로다. 앞에 가는 차 속도가 거북이 걸음이다. 조심 운전하나 하여 답답하였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다리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보호 차원에서 제한속도가 30 km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8월 13일 세종시에서 성균관박사공 묘소 참배를 한 후 공산성을 방문했다.
공산성 입구에 무료 주차하고, 길 건너편에 쌈밥집에서 점심 먹고 공산성과 무령왕릉을 관광하기로 했다. 막바지 여름 한 낮 햇볕은 뜨겁게 쪼인다. 공산성 입구는 주차장 바로 위지만 길이 가파르다. 수십 개의 비석이 도열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비석의 대부분은 이 고을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불망비(不忘妃)들이나 정말 그런 선정을 베푼 관리도 있었겠지만 더 높은 자리로 가는 사람들에게 마음에도 없으면서 그들의 권력이 무서워 또는 아부하려 세운 비석도 있었을 거라 생각해 본다.
높은 성벽 위에 금서루(錦西樓)가 있고 그 아래에 성벽을 통행하는 입구가 있다. 이렇게 높은 성곽과 망루가 있었을 가? 1993년 이 성을 복원할 때는 성안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어 성의 흔적도 없으나 1859년에 지은 공산지(公山誌)를 보고 복원했다고 한다.
금서루(錦西樓)를 지나니 성벽은 북쪽으로는 금강 쪽이고 남쪽으로는 공주 시내 남쪽으로 산성이 이어진다. 우리는 가까운 공산정(公山亭)까지 가 보기로 했다. 금서루 안쪽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 나무 아래 벤치에서 잠시 쉬면서 백제의 역사에 관하여 담소를 나눈 후 일어섰다. 나무와 흙으로 잘 쌓은 계단을 오르니 금강이 눈에 들어 왔다. 이 강이 흘러가듯 이 땅에는 왕도(王都)의 웅주 시절도 있었고, 인조가 이괄을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들어 왔을 때도, 6.25전쟁으로 금강교가 끊어지는 비극 등 역사도 흘렀다.
성벽 위에서니 공산정(公山亭)이 보인다. 이 산성을 오르는 누구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 정자 하나다. 이 좋은 경치를 누가 즐기지 않고 갈 수 있으랴! 우리의 옛 정자는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정자가 있다. 그런 정자에는 시인 묵객이 지나면서 시 한 수 읊고 현판을 늘 남겼다. 이곳 정자도 그럴만한 곳이지만 근래에 새로 지은 정자라서 현판 하나 없었다. 앞서간 조상들은 가난하지만 풍류를 즐기는 멋이 있었다. 시 한 수 지어 걸어 놓는 전통이 끈긴 지금 사람들은 잘 살지만 여유 없이 생활에 쫒기고 있다.
나도 비록 시 한 수 짓지 못하고 내려 왔지만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보는 조망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성을 한 바퀴(둘레 2,200m) 돌면서 자연과 역사를 즐기지 못하고 공산루만 조망하고 서둘러 내려 왔다.
주차장에서 바라 본 공산성(公山城)의 서쪽 문루(門樓)인 금서루(錦西樓)이다.
금서루에 오르는 길 옆에 많은 비석은 수 많은 사연을 뒤로 하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게 환영한다는 인사를 하듯이 도열하여 서 있다.
공산정으로 가는 성곽 위 길이다. 이곳에는 여장이 없이 성 안쪽으로 잘 만든 계단이 있다.
성곽에서 바라 본 금강교이다. 이 금강교가 만들어 질 때는 도청과 맞 바꿀 정도로 다리 하나가 소중했다고 하나 지금은 하나의 다리로서의 기능은 뒤로 하고 관광기념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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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루에서 서면 금강은 동쪽에는 내려 오고 서쪽으로는 흘러 가는 모습이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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