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판교공파종중 임원과 함께 2015년 8월 13일 오후 공산성을 방문 후 송산리고분군을 찾았다. 송산리 고분에는 1-4호 고분이 도굴되었고, 5-6호 고분도 일제에 의해 거의 발굴이라고 하지만 거의 도굴과 같았고 지석이 발견되지 않아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었으나 1971년 5-6호 고분의 배수 작업 중에 우연히 전혀 도굴되지 않은 무령왕릉을 발굴하였다. 이 발굴에서 108종 4,600여점의 귀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 중 금제관장식, 금제뒷꽃이, 금제귀걸이, 금제신발 등 많은 유물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무령왕릉은 현재 보존을 위하여 영구 폐쇄하였고 그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무령왕릉 방문에 앞서 5호 고분과 6호 고분을 방문하였다. 5호 고분은 돌로 쌓은 무덤이고 6호 고분은 벽돌로 쌓은 무덤이다. 신라 무덤은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만 묻어 버려 출입구가 없으나, 백제 무덤은 왕이 먼저 죽으면 왕비가 묻힐 자리도 같이 릉을 만들고 먼저 죽은 왕을 묻고, 나중에 왕비가 죽으면 출입구를 개봉하여 다시 왕비 시신을 넣고 묻어 출입구가 있다고 한다.
출입구를 통해 들어 간 고분 내부를 살펴보니 5호 고분은 6호 고분에 비하여 벽면이 깔끔하지 못했다. 건축기술이 많이 떨어졌다. 반면 6호 고분은 벽돌로 깔끔하게 잘 쌓았다. 건축기술은 무령왕릉에 비하여 약간 떨어지나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6호 고분의 특징은 동서남북으로 사신도를 그린 점이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에서 사자의 시신과 영혼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중국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벽돌을 쌓고 그 위에 회로 덧칠을 하고 그 위에 사신도를 그려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 덧칠이 떨어져 사신도도 많이 훼손이 되었다.
지금의 공주는 백제시대에는 웅진이라고 불렀다. 그 시대를 웅진시대라고 하며, 백제의 왕도가 있었던 시기로 서기 455년부터 538년까지 64년간이다.
6호고분, 밑에 아취형 문이 있고, 벽면에 사신도를 그린 벽화 흔적이 보인다.
6호고분, 벽돌 문양이 장구모양이이 있고, 빗살무늬가 있다. 벽돌의 이음새가 약간 맞지 않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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