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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조선조에 광산김씨를 빛낸 훌륭한 인물

by 仲林堂 김용헌 2015. 4. 18.

 

조선조에 광산김씨를 빛낸 훌륭한 인물

 

(1) 조선 4대 명필 자암(自庵) 김구(金絿, 1488-1534)

자암 김구(1488-1534)는 조선 중종 때 문신이다. 조선 4대 서예가의 한사람으로 대흥현감 계문의 아들이다. 김구는 성종19(1488)에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대유이다. 연산군 9(1503)에 한성시에 급제했고, 1507(중종 2)에 생원 진사 양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중종 8(1513)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 홍문관 부제학(3)에 올랐으나 기묘사화(중종141519)로 개혁파 조광조와 연루되어 고초를 겪게 된다.

자암은 처음에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후, 죄목이 추가되어 남해로 유배지를 옮겼다. 그는 남해 노량에서 13년이란 긴 세월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남해찬가'라 할 수 있는 경기체가 '화전별곡'을 지었다. 그는 삼남일대의 유림과 남해지역의 유림들과도 가까운 교우관계를 지냈다.

공은 글씨가 뛰어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유명하며 서울 인수방에 살아서 그의 서체를 인수체라 했다. 사후 선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예산의 덕잠서원, 군산의 봉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는 자암문집, 작품에 이겸인묘비, 자암필첩, 우주영허첩등이 있다.

공의 시문집 자암문집(自庵文集)21. 목활자본으로 1659(효종 10) 외현손 안응창(安應昌)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정두경(鄭斗卿)의 서문이, 권말에 안응창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권두에 자암기년록(自庵紀年錄)이 있고, 1에 시 76, 2에 부() 3, ((책문·(옥중상소·기우제문·묘갈음기·왜구수토록(倭寇搜討錄) 1, 서독(書牘) 5, 별곡 1, 단가 5, 부록으로 기묘명현·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각 체별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는데, 칠언절구가 가장 많다. 조촐한 시어의 사용과 참신한 비유는 성당(盛唐)에 가깝지만, 담담하고 절제된 비유 및 도학적이며 교훈적인 내용은 송시(宋詩)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부는 일반적인 미사여구에만 치우치지 않고, 문장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고 비유가 신선하다. 특히, 과진부(過秦賦)1507(중종 2) 사마시의 회시(會試)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얻은 작품이다. 옥중상소1519년 기묘사화 때 옥중에 있으면서 사림을 대변해 올린 것이다.

왜구수토록1522년 당시 빈번하였던 왜구들의 노략질에 대해 대대적으로 선단을 편성해 왜구를 색출, 토벌한 기록이다. 조선 초기 남해 지방에 출몰한 왜구와 조정의 방어 정책 등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별곡은 경상도 남해에 유배되었을 때 화전(花田)이라는 섬의 경치에 자신의 비운한 처지를 비유하여 국한문 혼용으로 간곡히 표현한 것이다.

고려 별곡체의 전통을 이어받은 가운데 한자 숙어를 많이 쓰고 있어, 변모를 겪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단가 또한 시조 형성의 초기 과정을 볼 수 있는 국문학적 자료로서 중요하다.

자암 선생의 삶과 예학의 세계를 집대성한 <묵향의 본향에서 조선 4대 명필, 자암김구를 만나다>라는 책자가 자암의 16대손인 김충희 자암기념사업회 회장이 자료를 모아 정리하고 예산문화원이 향토민속발굴사업 출판비를 지원해 2014년 발간하였다.

 

(2)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김덕령(金德齡, 1568-1596) 장군

장군의 자는 경수(景樹)며 붕변(鵬變)의 아들로 1568년 광주에서 출생하였고, 성혼의 문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부사 이경린, 장성 현감 이귀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의 명령을 받았으며 전주의 광해군분조(光海君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았다. 1594년 의병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된 후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왜군이 호남지방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 고성 지방을 방어했다.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 고성에 상육하려는 왜군을 기습 격퇴하여 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 중 한 사람이었다.

1595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속(奴屬)을 죽여 한 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이때부터 왕이 신임에 질투하는 대신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 신경행의 무고(誣告)로 체포되어 국문(鞠問)을 받았으나 혐의 사실을 부인하였으며 대신들 간에도 찬반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옥사했다.

1661년 신원되어 관작이 복직되고 1668년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다. 1681년 병조판서에 가증(加增)되었고, 영조 때 의열사에 제향되었고, 1788년 정조 12년에 좌찬성에 가증되었고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받았고, 109일 시호를 내리는 날 사제(賜祭)를 내렸으며 贈 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 贈 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우게 했다.

그의 형 김덕흥(金德弘)도 함께 비석에 기록하여 조정에서 영원히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보이라고 했고, 1789년 정조 13111일 쌍 정문(旌門)을 세우게 명하고, 1품으로 하비(下批)하였다. 그 해 46일 특별히 그 문중으로 하여금 따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정해서 향화가 끊이지 않게 하도록 명하였다.

 

(3) 우리나라 18현에 뽑힌 사계 김장생 (金長生, 1548~1631)

문원공 사계 선생 장생은 대사현 황강 김계휘의 아들로 조선조 중기(1548~1631)의 대유현,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공이다. 1557년 열살의 나이에 구봉 송익필(宋翼弼)로 문하에서 사서(四書)근사록 近思錄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선조 11)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 사포서(司圃署), 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 인의(引儀)의 직을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고, 1596년에 한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 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 익위(翊衛)의 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함으로써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에 조정에서주역구결 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광해군 2)에 회양, 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그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하여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이이, 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고,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다시 사직하여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을 뿐더러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같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그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 최명룡(崔命龍), 김경여(金慶餘), 이후원(李厚源), 조익(趙翼), 이시직(李時稷), 윤순거(尹舜擧)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아들 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 그리고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 이이. 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고 있었지만, 禮學분야는 송익필로부터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었던 송익필이 그의 아버지 祀連의 일로 還賤된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鄭曄 등과 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하여 서원을 세웠을 뿐더러 18천여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583년 첫 저술인 喪禮備要4권을 비롯, 家禮輯覽.典禮問答.儀禮問解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近思錄釋疑.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을 비롯하여 안성의 道基書院 10개의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이다.

 

(4) 우리나라 18현에 뽑힌 신독재 김집(金集, 1574-1656)

조선 중기의 유학자.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세거지는 충청도 연산(連山)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장생(長生)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대건(大乾)의 딸이다. 여덟 살에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 18세 때 진사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문장학을 좋아하지 않고 성현의 학문에 전심 하였다. 1610(광해군 2)에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을 거쳐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내고, 그 뒤 전라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 되었으나, 나가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한편,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으며, 윤선거(尹宣擧) 등과 상례를 논하고, 또 아버지가 찬한 疑禮問解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등, 활발한 학술활동을 폈다. 그 뒤 동부승지, 우부승지, 공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여, 태학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안팎으로 그 덕망을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76세 때는 대임(大任)을 맡게 달라는 김상헌의 특청을 임금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80세에 좌참찬을 거쳐 81세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임금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늘 초야에 묻혀 도()를 줄기고,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위로 이이(李珥)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김장생(金長生)을 이어받아, 그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 이황(李滉)을 이어받은 영남학파와 더불어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1883(고종 20)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와 효종묘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옥천의 창주서원(滄洲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의례문해속 疑禮問解續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5) 형제 대제학을 키워 낸 정경부인 해평 윤씨(海平尹氏)

이조참판을 지냈던 허주 김 반의 둘째 아들로 창주 김익희(金益熙:29)가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건주위의 청태종이 즉위식을 올리려는 참이었다. 그들은 이 식전에 조선의 사신을 참석시키고자 간계를 썼고 이곽은 참석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국내에서는 즉위식에 참석한 이곽 일행을 나라에 오명을 입힌 자라고 여론이 대단하였다. 이윽고 이곽과 나덕헌이 청국 서신 용골대(龍骨大) 등과 같이 귀국하였는데 김익희는 그의 아우 김익겸(金益兼:29)과 더불어 "이곽, 나덕헌을 죽여 8도에 효수하고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상자에 넣어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야 한다"고 상소를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이와 같은 소문을 듣고 객관을 몰래 빠져나가 저의 나라로 도망쳤고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호란 중 창주 김익희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는 독전어사로 싸우면서 척화를 주장하였고 조선조에 광산김씨로는 처음으로 양관 대제학을 지내신 분이다. 그의 아우 김익겸은 어머니인 연산 서씨를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 소수의 선비들로 군대를 편성하여 싸우다가 강화도가 점령됨에 원임대신인 선원 김상용과 함께 강화도의 남성루에서 자폭 순절하였다.

익겸의 어머니이자 허주공 반의 부인인 연산서씨는 강화도에서 피난 중 왕후와 세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아들과 함께 순절하니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충정공 김익겸의 부인 정경부인 해평윤씨는 선조의 사위인 문목공 신지의 손녀로서 부덕을 겸비하고 문장이 출중하여 신사임당과도 비 길만 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강도로 피난했다가 시어머니인 연산서씨와 남편을 여의고 해평윤씨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잉태 중 만삭이었고 큰 아들 만기 역시 다섯 살인 유아였으므로 죽지 못하고 돌아오는 배안에서 둘째인 만중을 출산하였다. 친정으로 돌아와 두 아들을 법도로 가르쳐 소학, 사략, 당시 등을 직접 가르칠 때 공부하는 과정은 지극히 엄격하였다. 항상 훈계하기를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는 같지 않으니 남보다 한층 더 노력해야 겨우 남과 같을 것이다"하고 "사람들은 행실이 모자라는 자를 꾸짖을 때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이라 하니 너희들은 뼈에 새겨들어라"하였다. 형제가 허물이 있으면 손수 매를 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가 너희 형제를 내게 부탁하고 세상을 버렸으니 너희가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너희 아버지를 대하겠느냐? 학문을 하지 않고 살려면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스스로 미망인이라 일컫고 종신토록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큰 아들 만기가 과거에 급제했을 때 비로소 잔치와 음악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가문의 경사요 내 한 몸의 사사로운 기쁨이 아니다"고 했다. 만중 또한 과거에 급제하고 형제가 모두 양관 대제학이 되었을 때 비로소 웃으며 "네가 이제 지하에 가서라도 너희 아버지를 뵈올 면목이 섰다"고 하였다.

익겸의 아들 만기는 뒤에 영의정과 국구가 되었고 만중은 국문학의 대가인 서포로서 구운몽사씨남정기등을 저술하였다.

서석 김만기(金萬基:30)는 다섯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아버지인 김익겸을 잃어버리고 어려서부터 숙부인 창주 김익희에게 수학하다가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효종 3(1652) 사마시를 거쳤고 그 이듬해에 별시 문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수찬, 정언, 교리를 역임하였다. 현종 12(1671)에 딸이 세자빈(숙종비인 인경왕후)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에 숙종이 즉위하니 국구가 되어서 광성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영돈녕부사(1)에 승진되었다. 그 후 문곡 김수항의 천거를 받아 대제학에 올랐으며 숙종 6(1680) 경신대출척 때에는 훈련대장으로서 공을 세워 보사 1등공신이 되었다. 사후에는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서석의 아우인 서포 김만중(金萬重:30)은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현종조에 정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각종 벼슬을 두루 거쳐서 예조판서겸 양관대제학을 지냈는데 숙종 임금께 아뢰기를 장희빈에게 은총을 줌이 잘못이라고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선천과 남해등지로 유배되었다. 서포는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인 윤씨부인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시어머니와 남편을 잃고 혼자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돌아오는 도중 배 위에서 만중을 낳아 길렀다. 그러한 사연이 있는 서포 이었기에 유배도중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소설을 썼다.

서석 만기와 그의 아들인 죽천 김진규(金鎭圭:31)와 진규의 아들인 건암 김양택(金陽澤:32)은 어느 문중에서도 드문 3대 대제학을 지냈고 또 경대 김상현(金尙鉉:36)과 하정 김영수(金永壽:37)가 대제학이 되었으니 7대제학 모두가 사계선생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문형을 배출하였으니 놀라지 않는 이가 없다.

 

(6) 최초 한글소설 구운몽을 쓴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

아래 글은 광산김씨허주공종중에서 발간한 송백현 편 光山金氏 沙溪 文元公 宗中 虛舟公派 世蹟錄에 있는 내용이다.

김만중은 1637(인조15)에 태어나 1692(숙종 18)에 타계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아명은 선생(船生)이고 자는 중숙(重淑)이며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조선시대 예학의 대가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요, 충정공(忠正公) 김익겸(金益兼)의 유복자이며,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尹斗壽)4대손이며,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 윤방(尹昉)의 증손녀이고, 이조참판 윤(尹墀)의 딸인 장한 어머니 해평윤씨(海平尹氏)이다.

그는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충정공 김익겸은 일찍이 1637년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기 때문에 형 김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여 살아가야만 했다.

그의 아명을 선생(船生)이라 한 것은 정축호란(丁丑胡亂) 때 윤씨부인이 뱃길에서 그를 낳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며, 호가 서포인 것은 그가 관서지방인 평안도의 선천(宣川) 서포(西浦)로 유배되었을 때 스스로 그 지역을 호로 쓴 것이다. 또한 그에게 내려진 시호가 문효(文孝)인 것으로도 그가 출천(出天)한 효자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기 때문에 그의 형 만기(민기)와 함께 어머니 해평윤씨만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했다. 윤씨부인은 본래 가학(家學)을 이어 숙덕(淑德)을 갖추었기에 아들 형제가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그이 조카 김진규(金鎭圭)가 지은 행장에 의하면 서포는 젖을 먹을 때 어머니가 입으로 글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곁에서 형님(김만기)이 글을 읽는 것을 듣고 문득 대체의 뜻을 통했고, 7-8세 때부터 글재주가 이미 발원하니 사람들은 그들 형제의 기특함을 탄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열 살도 못되어 연이어 조부인 허주(虛舟) 김반(金槃)과 외조부인 이조참판 윤지(尹墀)의 상을 당했으므로 어머니로부터 엄한 훈도를 받으면서 외증조부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와 중부(仲夫) 김익희(金益熙)에게서 경사(經史)를 배우고 그의 형 김만기를 따라 시 짓기를 배웠다.

열두 살에 이미 과문(科文)이 성숙되고 열네 살에 총각으로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열여섯 살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조금 장성하면서 재주가 더욱 초월하여 옛 작가의 궤범을 따르고자 하고 과거에 필요한 글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험장에서는 남보다 뛰어났다. 29세 때인 현종 6(1665)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니 지은 바 표문(표문:46)이 근래에 있던 바가 아니므로 고시관이 우등으로 비점(批點)을 쳤다. 이어 처음으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고, 예조좌랑(禮曺佐郞)에 옮겼다. 현종 7(1666)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자 곧 사직하고,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현종 8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겼다가 문학(文學)으로 전직되었고, 옥당(玉堂)에 들어가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후 그는 헌납(獻納), 공조판서(工曹判書), 대사헌(大司憲),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서포는 숙종 14(1688)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의 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선천 땅으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선천 배소에서 풀려나오기는 했으나 3개월 뒤인 숙종 15(1889) 2월 집의(執義) 박진규(朴鎭圭), 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 등의 논핵(論劾)을 입어 극변(極邊: 지극히 먼 지방)에 안치되었다가 곧 경상도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 윤씨 부인은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타계하였다. 본래 서포의 효성은 하늘이 내린 바라 그의 선친 충정공에게 하지 못한 효성을 어머니께 아울러 쏟으니, 항상 그 곁에서 가까이 모시면 순하고 기쁜 낯빛으로 자안을 받들어 마음을 즐겁게 하기를 옛사람과 같이 하였다. 그는 글을 좋아하는 어머니께 사기(史記)나 패관소설(稗官小說)을 읽어드리고 부득이 어머니가 슬하를 떠나 있을 때는 멀리서 강녕(康寧)을 빌고 시문(詩文)을 통하여 효성을 표하고 복받치는 사모지정(思慕之情)을 억누르기 못하였다. 그가 남해의 외로운 섬에서 위리안치 되었을 때,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듣고 다만 대성통곡하며 그 읍별(泣血)의 행장을 지어 바치고 삼년 동안 설위(設位)하여 호곡(號哭)하다가 숙종 18(1692)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그 뒤 숙종24(1698)에 그의 관직이 복고 되었고, 숙종 32(1706)에는 효행에 대하여 정려가 내려졌다.

그의 문학과 사상은 그 이전의 어느 문인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본래부터 총명한 재능을 타고 나기도 하였지만, 가문의 훌륭한 전통 등으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도 상당한 경지를 이룰 수 있었다. 그가 가끔 주자(朱子)의 논리를 비판했다든지,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든지 하는 점은 결코 위와 같은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이 사상적 진보성향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정한 한계는 있겠으나,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 예찬론은 주목받았다. 그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지은 思美人曲등의 한글가사를 굴원(屈原)이소(離騷)에 견주었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개명의식(開明意識)의 소산으로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구운몽은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이규경(李圭景)오주연문장전산고속의 소설변증설중에서. 그런가하면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오라고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렸다가 대신 귀로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집안에 전해지고 있다.

사씨남정기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한 사건에 대하여 숙종의 혼심(昏心)을 회오(悔悟)하게 하여 모든 것을 원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권선징악의 수법을 고도로 원용하여 쓴 작품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일종의 국자의식(國字意識)”은 높이 살만하며, 더구나 그가 구운몽」․「사씨남정기와 같은 국문소설을 창작했다는 점과 관련해 볼 때, 허균(許筠)을 잇고, 조선 후기 실학파 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의 묘소가 휴전선 근처인 장단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대전시 전민동에 있는 그의 부모 묘소가 있는 묘역에다 후손들과 그를 추앙하는 이들이 뜻을 모아 최근에 새로이 정문과 효자비 및 문학비, 충효소설비 등을 세웠다.

슬하에 충주목사 김진화(金鎭華)와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에게로 출가한 딸이 있다.

아래는 남해 유배지에서 어머니 생신에 지은 시이다.

今朝慾寫思親語 금조욕사사친어

字未成時漏已滋 자미성시누이자

幾度濡毫還複擲 기도유호환복척

集中應缺海南詩 깁중응결해남시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는 말 쓰려하니

글자도 쓰기 전에 눈물 이미 넘쳐나네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다시 던져 버렸으니

문집 가운데 해남 시는 응당 빠지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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