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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고려조에 광산김씨를 빛낸 훌륭한 인물

by 仲林堂 김용헌 2015. 4. 18.

 

고려조에서 광산김씨를 빛낸 인물

시호(諡號)를 받은 훌륭한 인물

시호는 종친과 문무관 중에서 정2품 이상을 지낸 사람으로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이 죽으면 그 공덕을 찬양하여 임금이 내려 주는 호. 시호에는 (((((((((((((((((() 120자를 사용하였다.

 

(1) 문정공 김책(金策)

생졸년 미상. 고려 전기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증조부는 김식(金軾)이고, 조부는 김길(金吉)이며, 부친은 김준(金峻)이다.

아들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김정준(金廷俊)이다.

964(광종 15) 갑자(甲子) 3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과거(科擧)를 실시하였을 때, 조익방(趙翌榜)에서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니, 임금께서 잔치를 베풀어 급제를 축하하였으며, 또한 특별히 의봉문(儀鳳門)을 열어 말()을 하사하면서 마부로 하여금 고삐를 잡고 출입케 하여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

벼슬은 여러 요직(要職)을 거쳐 좌복야(左僕射)한림학사(翰林學士)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2) 문안공 김양감(金良鑑)

1070(문종 24) 상서우승 좌간의대부(尙書右丞左諫議大夫)에 이어 서북로병마부사가 되고, 이듬해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074년 태복경(太僕卿)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단(盧旦)과 함께 송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종전의 등주(登州)를 거치는 항로를 요나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명주(明州 : 浙江省)로 변경하는 데 합의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동지중추원사·호부상서·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參知政事判尙書兵部事권판중추원사(權判中樞院事)를 거쳐 1082년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선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실을 진술하고 이어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에 올랐다.

1090(선종 7)에 문하시랑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우간의 손관(孫冠)과 함께 진사 이경필(李景泌) 등을 뽑았는데, 그 답안이 격식에 맞지 않아 주사(主司)에 밝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자겸(李資謙)과 인척이면서도 정의를 지켜 끝까지 그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저자라고 전하기도 한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3) 사정공 김약온(金若溫, 1059-1140)

초명은 의문(義文), 자는 유승(柔勝). 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양감(良鑑)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상의봉어(尙衣奉御)를 거쳐 광주통판(廣州通判)이 되었다가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이어 합문사(閤門使)가 되었으며 1122(예종 17)에는 지추밀원사 겸 태자빈객(知樞密院事兼太子賓客)에 올랐다.

이 해 5월 인종이 즉위한 뒤 참지정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검교사도 수사공 상주국(檢校司徒守司空上柱國)이 되었다. 1140(인종 18)에 문하시중으로 사직하였다.

성품이 공검(恭儉), 청렴하고 교만하지 않아, 이자겸(李資謙)이 권력을 쥐고 휘두를 때 그와 인척간이면서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시호는 사정(思靖)이다.

 

(4) 충정공 김의원(金義元, 1066-1148)

1109(예종 4)에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으로서 허재(許載)와 함께 길주에서 여진과 싸워 30명을 살해하고 많은 병기와 우마를 노획하였다.

뒤에 형부시랑(刑部侍郎)이 되어 1113년 예부상서 홍관(洪灌)과 같이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태후의 우제(虞祭)에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여준 것을 사례하였다.

1126(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인종이 중흥택(重興宅 : 李資謙私邸)으로 옮길 때 대경(大卿)으로서 중흥택집사(重興宅執事)가 되어 왕을 맞아들였다. 이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으나 이자겸의 실각과 더불어 지방수령으로 좌천되었다.

 

(5) 문숙공 김주정(金周鼎, 1228-1290)

공은 학문을 좋아하였고, 성격이 침착, 관후하며 과묵하고 누구와도 함부로 사귀지 않았다. 음서(蔭敍)로 부성위(富城尉)가 되었다.

1264(원종 5) 5월 과거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며, 그 뒤 해양부녹사(海陽府錄事)에 임명되고, 또 김준기(金俊器)의 추천에 의해 내시(內侍)직에 소속되었다가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이부시랑에 이르렀다.

1275(충렬왕 1) 대부경 좌사의대부(大府卿左司議大夫)에 임명되어, 이듬해 안렴사(按廉使수령들의 근무태도와 공물·부역이 고르지 않은 것과 향리가 세력을 믿고 부역을 피하는 등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대책을 올려 채택되었으나, 좌우의 저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1278(충렬왕 4)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우부승지로서 수행해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왕경유수군(王京留守軍합포진수군(合浦鎭守軍) 및 황주·봉주(鳳州염주(鹽州백주(白州) 둔전군의 뒷받침이 번거로워 백성들의 고통이 심한 것과, 김방경(金方慶)이 무고를 입어 유배된 사실 등을 원나라에 밝힌 공으로 귀국해 좌부승지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 해에 재추회의(宰樞會議)에서 따로 필도치(必都赤 : 몽고어로 서기라는 뜻)를 두어 중요한 국사를 담당하게 하도록 건의하였으며, 또 내료(內僚)의 계사(啓事 : 궁중의 관리가 임금에게 정사를 알리는 일)를 금지하고 신문색(申聞色)이 대신하도록 주장하였다.

이것이 관철되어 필도치와 신문색에 뽑힌 사람들이 궁중에 모여 중대사를 결정하니 이를 당시 사람들은 별청재추(別廳宰樞)’라 불렀다.

그가 자기 딸을 대장군 윤수(尹秀)의 아들에게 출가시키면서 윤수를 승지에 임명하도록 청하므로 조인규(趙仁規)가 예가 아니라고 하자, 다시 내료에게 청해 비난을 받았다. 또한, 응방도감사(鷹坊都監使)가 되어 응()과 견()으로 왕에게 아첨해 권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1280(충렬왕 6)에는 중서성에 청해 소용대장군 좌우부도통(昭勇大將軍左右副都統)이 되고, 호두금패(虎頭金牌)와 인()을 받았다. 다음해에 김방경과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로 향하였으며, 5월에는 주사(舟師)로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대명포(大明浦)에 이르렀으나, 태풍을 만나 병선이 전복되어 많은 군사들이 익사하게 되었는데 이 때 많은 사람을 구출하였다.

1284(충렬왕 10) 진변만호(鎭邊萬戶)가 되면서 남도의 해변을 순력하였다. 이 무렵 수선사(修禪社)에 있던 충지(冲止)5월 하순에 절박한 당시 사정을 시로 지어서 그에게 보낸 적이 있다.

이 시에 의하면 그는 충지를 방문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나 이를 어겼다고 한다. 1287(충렬왕 13)에 군신이 모여 연회를 할 때 무례한 행동을 해 청주목사로 좌천되었다.

 

(6) 양간공 김연(金璉, 1215-1291)

()1215出生하고 1291525()하니 수()77이다. 고려 충렬왕때의 문신으로 初名은 중룡(仲龍)이고 자()는 기지(器之)이며 아버지는 증 문하시랑(贈 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대린(大鱗)이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김씨(光州金氏)로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俊齡)의 따님이다. 광산김씨 5대파 중 가장 큰 파인 양간공파의 파조이다.

공은 천품이 준수 비범하였고 눈썹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았으며 어릴 때부터 내시(內侍)가 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셨다. 1238(고종 25 戊戌)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선정(善政)하였고 네 고을에 치적(治積)을 남겼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1275(충렬왕 1) 경상도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동정(同征: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일)할 전함(戰艦)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꿈에 허리에 찬 금어(金魚: 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으로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니 스스로 해몽(解夢)하기를 "몸의 장식이 이미 갔으니 이제 오래 머물 수 없다"하고 사퇴하니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승진시키고 이어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匡靖大夫 僉議侍郞 贊成事)로 치사(致仕)했다.

화상(畵像)이 있었으나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고 화상찬(畵像贊)만 남아있다. 1261(원종 2)에 발행된 호적(戶籍)이 후손(後孫) 부필(富弼)의 종가(宗家)에 보존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현존(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이다.

시호는 양간공(良簡公)이다. 1781(정조 5) 고창군 고수면 전불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설단 하였다.

는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조씨(綾城曺氏)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 (), 검교신호위장군복정(檢校神虎衛將軍僕正) 추재(樞材), 曾祖 호장보윤(戶長甫尹) 자렴(子廉), 外祖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주(貞州) 정장(鄭莊)이다. (見高麗史列傳, 有畵像贊及辛酉戶籍).

(7) 문정공 김태현(金台鉉, 1261-1330)

문정공 김태현(金台鉉, 1261-1330)은 고려 후기 문신으로 자는 불기(不器), 호는 쾌헌(快軒) 또는 설암(雪菴)이며 증 문하시중공 시호를 받았다. 15세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하니 숙부 문숙공 김주정이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좌우위 참군으로 벼슬길에 올라 1288년 권지가 되고 1321년 첨의평리에 기용되어 판삼사사가 되었다. 그 후 요직을 두루 거쳐 1327년 삼중대광 문화시중 수문관 대제학 겸 전리사사롤 치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배는 대부인(大夫人) 김씨니 1남을 두었고, 계배(繼配)는 개성군대부인(開城郡大夫人) 왕씨(王氏)에서 3남을 두었다. 아들은 의랑공 광식(光軾), 문민공 광철(光轍), 문간공 광재(光載), 록사공 광로(光輅). 묘는 경기도 개풍군 중면 대룡리 대야치 덕운산(開豊郡 中面 大也峙 德雲山)에 있다. 이북 땅에 있어 가지 못해 광주직할시 광산구 신창동 산 179-1에 설단하였다.

 

(8) 충숙공(忠肅公) 김심(金深, 1262-1338)

아버지는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 주정(周鼎)이다. 1279(충렬왕 5) 김흔(金忻) 등과 함께 뚤루게(禿魯花 : 볼모)로 원나라에 다녀온 뒤 낭장이 되었고, 1298년에 우부승지가 되었다.

1303(충렬왕 29)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오기(吳祁석천보(石天輔) 등이 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왕의 부자를 이간하므로 홍자번(洪子蕃) 등과 함께 삼군을 이끌어 오기를 잡아 원나라에 보냈다.

그 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고, 1304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오기 등을 처벌해준 데 대한 표()를 원나라에 갖다 준 뒤, 지밀직사사로 승진하고, 아버지의 직을 이어서 만호(萬戶)가 되었다.

1305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충선왕과 함께 돌아와 도첨의참리판삼사사(都僉議參理判三司事)가 되었다. 1307년 동녀(童女) 18명을 데리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1309(충선왕 1)에 딸이 원나라 인종의 비가 되자, 원나라의 세력으로 고려도원수(高麗都元帥)에 올랐으며, 이어 찬성사가 되었다.

1310년 밀직사가 되고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당시 원나라에 가 있던 충선왕은 전지(傳旨)로 정치를 하면서 본국의 물자만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한공(權漢功최성지(崔誠之박경량(朴景亮) 등의 소행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이들의 죄상을 원나라의 휘정원(徽政院)에 탄원해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원나라의 태후에게 석방해주도록 탄원하고, 권한공 등도 뇌물을 써서 풀려나게 되자, 도리어 이사온(李思溫) 등과 함께 임조(臨洮 : 甘肅省)에 장류(杖流)되어 5년 만에 풀려났다.

1324(충숙왕 11) 수첨의정승 판총부사 여절보안공신(守僉議政丞判摠部事礪節保安功臣)이 되고, 다시 수성수의충량공신 화평부원군(輸誠守義忠亮功臣化平府院君)으로 개봉되고, 협보공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1327년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보좌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당시 섭행정동성사(攝行征東省事) 장백상(蔣伯祥)이 재물을 탐내고 권세를 남용해 백성의 원망이 커지자, 원나라에서 객성태사(客省太史) 도치(都赤)를 보내어 장백상을 가둔 뒤, 홍수(洪綬)와 함께 성사(省事)를 대행하게 하였다.

1330(충혜왕 즉위년) 벼슬이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렀다.

 

(9) 정경공 김사원(金士元, 1257-1319)

정경공 김사원은 양간공 김연의 아들이고, 장영공 시호를 받은 김진의 아버지이다.

1310(충선왕 2) 6월 권신(權臣)인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 이대순(李大順)의 부인 위씨(韋氏)가 영평궁(永平宮)과 노비문제로 다투게 되었을 때 언부전서(讞部典書)로서 산랑(散郎) 이광시(李光時)와 함께 그 안건을 주관하여 위씨에게 노비를 주지 않았다.

이에 이대순이 모함하여 장형(杖刑)에 처하고 귀양가게 하였다. 1311년 평양윤(平壤尹)이 되었으며, 12월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다. 1316(충숙왕 3) 4월에 상의회의도감사(상의회議都監事)가 되고 뒤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었다. 시호는 경정(景貞)이다.

 

(10) 문민공 김광철(金光轍, -1349)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둔재(鈍齋). 아버지는 중찬(中贊) 태현(台鉉)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1344(충목왕 즉위년) 6월에 서연(書筵)이 베풀어지자 지신사(知申事)로 시독(侍讀)하였고, 13472월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판사가 되어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였다. 그뒤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11) 문간공 김광재(金光載, 1294-1363)

문간공 김광재는 자가 자여(子輿), 호는 송당(松堂). 중찬(中贊) 문정공 김태현(台鉉)의 셋째 아들이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해 성균학관이 되었다.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공로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승진했고,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1339(충혜왕 복위 1) 조적(曺頔)이 난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호종하였다. 고려에 돌아와서 군부총랑(軍簿摠郎)이 되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올랐다. 이 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군준(李君俊)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대신들이 아부하지 않는다고 모함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전임되었다. 그러나 곧 밀직부사·제조전선(提調銓選)을 지내고, 지사사(知司事)에 승진하였다. 1349년 충정왕이 즉위하자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그 사부(師傅)가 될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인사권을 맡았으나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정사 간섭이 심해 물러났다. 그 뒤 덕녕공주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1350(충정왕 2)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는데, 이 때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과 무선(武選)을 총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건의해 이를 시정하도록 했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후 12년간이나 은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했고, 어머니가 죽자 여막에서 상을 마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정표(旌表)하고, 그 마을의 호() 일부에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 그에게 이를 봉사하게 하였다. 그는 효제(孝悌)에 힘써 생산에 관심이 없었고, 항상 거문고와 글을 가까이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2) 장영공(章榮公) 김진(金稹) (1292- )

공은 충렬왕 181292년 태어났다. 장영공(章榮公) 시호를 받았다. 1307년 추장(秋場) 제술 시험에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충숙왕 201333년에 벼슬이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에 되었다. 충숙왕 후 원년 경진 1340년 시관이 되어 양윤식 등을 뽑았다. 13427월에 정당문학 상시관을 삼고 지신사 신예로 부시관을 삼아 진사를 뽑을 때 이자에게 을등 급제를 주었다.

 

(13) 충정공 김약시 (金若時, 1359-1406)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황주(黃州) 산골에 은거하여, 조선 태조가 직제학으로 임용하였으나 절개를 지켜 응하지 않았다. 순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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