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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분파도(대파, 중파)

광산김씨 양간공 김연 후 중파 해설과 분파도

by 仲林堂 김용헌 2015. 4. 17.

 광산김씨 양간공 김연 후 중파 해설과 분파도 


양간공 김연은 정경공 김사원과 참지정사공 김사형 두 아들을 두었다.  


1. 정경공파

정경공 사원은 아들 진을 두었고, 진은 전리판서공, 판군기감사공, 사온승공, 판도판서공, 밀직부사공 등 5대 중파로 나뉜다.


(1) 전리판서공파

전리판서공 김광리(김광림)는 증조가 양간공 김연이고, 조부가 정경공 사원이고, 아버지가 장영공 김진의 5형제 아들 중 큰 아들로 전리판서공의 파조이다. 전리판서공파는 17세부터 21세까지 가장 자손이 많은 파이다. 공은 김인우, 김갑우, 김삼우, 김시우, 김남우 등 5형제를 두었으며, 큰 아들인 인우는 전리판서공 김성지와 사은공 김승길을 두었으며, 다시 김정시는 예조판서공 김연경과 부사공 김안경을 낳았고, 김승길은 군기사정공 김오행과 감역공 김오음을 낳아 분파된다.

18세 김남우는 중령낭장공 김유, 두암공 김유, 부자식공 김직, 사직공 김효복, 승사랑공 김효노, 현감공 김태길 등 6형제를 두어 크게 자손이 번성했으며 모두 벼슬을 하였다.

전리판서공 김광리는 큰 아들 김인우도 전리판서가 되었고, 큰 손자 김성지도 전리판서공이 되어 3대 전리판서가 되었다.

21세 김백겸(金伯謙)은 아버지가 증호조판서 혁()이며, 어머니는 현감 곽휴(郭休)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1458(세조 4) 내금위에 보직되었으나, 1460년 무과에 급제하여 승의교위(承義校尉)가 되었다. 그 해 북쪽에 야인이 국경을 침범하여 자주 양민과 물건을 약탈하자 김질(金礩)을 따라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그뒤 1462년에는 대호군(大護軍)에 올랐다. 1467년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구성군 준(龜城君浚)의 군관으로 출정하여, 평정에 공을 세워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이등에 책록되고 중추첨지사에 임명되었다.

곧이어 공조참의가 되고, 다시 건주위(建州衛)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의주목사로 승진되었다. 1470(성종 1) 평안도우후 등을 역임하고, 1472년 가선대부로 광원군(光原君)에 봉해졌다. 1473년 겸사복장(兼司僕將)을 역임하고, 1477년에는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84(성종 15) 하정사(賀正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평안도절도사로 부임하였으나 관찰사 성준(成俊)과 뜻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1487년 다시 절도사로 있으면서 변방경비를 소홀히 하여 인마를 약탈당한 죄로 변방에 충군(充軍)되었다가 뒤에 다시 특진관(特進官) 등에 서용되었다. 시호는 양호(襄胡)이다.

(2) 판군기감사공파

판군기감사공 김영리(金英利)는 장영공 김진의 5아들 중 둘째 아들로 판군기감사공파의 파조이다.

공은 1347(충목왕 3) 2월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면서 각 도 및 강릉·평양 등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민전(民田)을 측량하고 폐정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 이원구(李元具)와 함께 전라도에 파견되어 안렴(按廉존무사(存撫使)를 겸했다. 당시는 전정(田政)이 극도로 문란하였으므로 이러한 조처에 대해 불평하는 무리도 많았다. 1354(공민왕 3) 4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다.

공의 아들은 광성군 김정이고, 손자는 도관찰사공 김약채, 척약제공 김약항, 직제학공 김약시이다. 도관찰사공 김약채는 검열공 김문, 김천(無後), 총제공 김한, 퇴촌공 김열 사형제를 두었고, 척약제공 김약항은 부정공 김허, 양온서령공 김처, 사마공 김려 삼형제를 두었고, 직제학공 김약시는 성주목사공 김췌, 현감공 김절, 감무공 김원우 삼형제를 두었으며, 그 후 21세에도 자손이 번성하였다.

광성군 김정의 큰 아들 김약채(金若采)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권세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왕 때 좌사의(左司議)로 조반(趙胖)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참여하였다. 1388(우왕 14)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 지신사(知申事)로 이에 항거하였다 하여 외방에 유배되었다. 1400(정종 2) 문하부좌산기(門下府左散騎)로 있을 때에는 훈친(勳親)들에게 사병을 허여하는 제도를 없애고, 병권을 모두 중앙에 집중시키자고 역설하여 단행하게 하였다. 그 뒤 대사헌을 지내고, 1404년 충청도도관찰사가 되었다.

광성군 김정의 둘째 아들 척약재공 김약항(金若恒)1371(공민왕 20)에 문과에 급제하여 1390(공양왕 2)에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었으나 설화(舌禍)를 입어 지곡주군사(知谷州郡事)로 좌천되었다가 그 해 10월에 강원도염문계점사(江原道廉問計點事)를 지내고, 1392년에 사헌집의(司憲執義)가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고, 1395(태조 4)에는 명나라에 들어가 억류된 사절 유순(柳珣) 등을 송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표전(表箋)의 내용이 불공하다 하여 명나라에 불려가 억류되었다가, 곧 풀려나 현지에서 조선 조정으로부터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해졌다. 뒤에 다시 다른 일로 인해 양쯔강(揚子江)으로 귀양갔다가 1397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광성군 김정의 셋째 아들 직제학공 김약시(金若時)는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황주(黃州) 산골에 은거하여, 조선 태조가 직제학으로 임용하였으나 절개를 지켜 응하지 않았다. 순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김약채의 증손 김국광(金國光)은 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책봉되었으며 경국대전을 지었다. 김국광의 5세손 사계 김장생(沙溪 諱 金長生)선생은 기호유학의 거대한 봉우리를 일으켰다.

 (3) 사온승공파

사온승공 김성리(金成利)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사온승공파 파조이다. 아버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장영공(章榮公) ()과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권씨(福州(安東)權氏)로 상호군(上護軍) 윤명(允明)의 딸이다.

공은 공민왕(恭愍王) 壬辰年 문과(文科)에 급제 하였으며 벼슬은 판전의사사(判典醫寺事)와 통정원 사온승동정(司丞同正)을 역임하였다. 문학이 절륜(絶倫)하고 효우가 독실하여 사림의 추중한바 되었다.

사온승공 김영리는 아들 김함을 낳고, 김함은 대사성공 김성옥, 부사공 김원길, 이조정랑공 김광련을 낳아 세파로 분파되었다. 김성옥은 고향현감공 김치온과 예조좌랑공 김경온을 낳았으며, 김경온은 김자분, 김자보, 김자괴 등 3 아들을 두어 분파되었다.

24세 김수연(金壽淵)은 진해현감 김혼(金混)의 아들로 명종 무오년 무과에 등제하였다. 공은 정유왜란에 적순부위(迪順副尉)로 세 아들 몽필(夢弼), 몽령(夢齡), 몽업(夢業)과 함께 병사 이복남을 쫓아 남원성을 지키다 전사하여 성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녹선 되었다.

 

(4) 판도판서공파

판도판서공 김안리(金安利)16세 장영곤 김진(金稹)4째 아들로 판도판서공파의 파조이다. 아버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장영공(章榮公) 김진(金稹)과 어머니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복주권씨(福州(安東)權氏)로 상호군(上護軍) 윤명(允明)의 딸이다. 고려 충숙왕 무진생이며 벼슬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판도판서공파 김안리는 좌랑공 김참을 낳았고, 김참은 부령공 김약원을 낳고, 김약원은 판도좌랑공 김민을 낳고, 김민은 김이반을 낳았다. 한편 21세 동래부사공 김자민은 선대를 실전하여 알 수 없으며 후대를 이어 내려 왔다.

 

(5) 밀직부사공파

밀직부사공 김천리(金天利)16세 장영곤 김진(金稹)5째 아들로 밀직부사공파의 파조이다.

밀직부사공은 소강공 김무와 밀직대언공 김예를 두었고, 김무는 평시서령공 김탄지와 김숭지를 두었고, 김탄지는 김백손을 두었고, 김백손은 첨지추공 김휘를 두었다. 19세 김숭지는 음성현감공 김회를 낳고, 김회는 김효로(金孝盧)를 두었다. 김효로는 안동시 예안면 오천리로 처음 입향한 예안파의 입향조이다. 한편 18세 김예는 김기지를 낳고, 김기지는 김정을 낳고, 김정은 대사성공 김흥일을 두었다.

 


2.  참지정사공파

참지정사공 김사형은 아버지가 양간공(良簡公) ()이며, 어머니는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조씨(綾城曺氏)로 예부상서(禮部尙書) ()의 딸이며, 참지정사공파의 파조이다.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였다.

참지정사공파는 분파가 없이 외 손으로 내려와 자손이 아주 적다. 파조인 15세 이후 16세 상서공 김찬, 17세 광산군 참지정사공 김서남, 18세 부윤공 김수백까지 외아들로 대를 이었으며 19세에 대호군공 김송과 김현으로 분파되었다.

17세 김서남은 광산군 작위를 받았으며, 조부인 김사형과 같이 참지정사로 광산군 김서남이 참지정사공파 파조라고 할 수 있다. 20세 김을상은 광산부원군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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